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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문서] 진산의 와우 공격대 이야기 Naxx 편 - 펌금지입니다. 게임 이야기

진산님과 연락해서 이 글을 여기에 공개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단, 다른 곳에 퍼가는 것은 절대 불가 라고 하십니다.
좋은 글이 잘 유지될 수 있도록 협조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07년 12월 좋은 리더가 되는 길 - WoW 의 공격대 이야기 이라는 글을 올렸었습니다.
옛날 블로그를 정리하다가 원문 링크를 열어보니 없어졌더군요.
이 분 덕분에 웹 아카이브에 자료가 꽤 많이 정리되어 있다는 걸 발견했지만
언제 없어질지 몰라서 제 블로그에 옮겨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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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대 이야기 [Naxx] - 0 : 세상의 끝에서 다시 시작하는 이야기

공격대 이야기, 낙스라마스편을 다시 쓰기로 결심한 것은 순전히 충동적인 이유 때문이다. 공대장을 그만두면서 아마도 조만간 레이드를, 그리고 와우를 떠나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나는, 뜻밖에도 여전히 레이드를 하고 있다. 지난 주 드디어 낙스라마스에 진출을 했고 첫 도전 주간에 두 네임드를 잡았다. 떠나간 사람도, 돌아온 사람도, 새로 만나게 된 사람도 있지만 40명의 바보들이 엮어내는 이야기는 여전히 살아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나는 와우라는 세계 안에 세기말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느낀다. 코 앞에 다가온 확장팩 불타는 성전의 개봉은 분명히 기존의 와우 세계를 이루고 있던 질서를 총체적으로 뒤흔들 것이다. 무엇보다도, 40인 레이드 유저들에게 다가올 변화가 가장 커 보인다.

만약 신의 사자가 어느날 우리 앞에 나타나서 '너희들은 이 지구만 알고 있지만 사실 조물주는 또 하나의 별을 만들었고 거기서는 좀 더 윤택한 생활을 할 수 있다!' 라고 알린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이 세계 안에서 얻을 수 있는 만큼을 얻기 위해 노력하던 사람들은 어디로 가게 될까?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것이 허무해지지는 않을까? 무의미해지지는 않을까?
낙스라마스는 블리자드가 공식적으로 40인 인던으로서는 마지막으로 내놓는 컨텐츠라고 밝혔다. 즉, 이제 낙스라마스 이후에는, 더 이상 40명의 바보들 이야기는 없다. 좀 더 정예화된 25인의 바보들 이야기는 나올 수 있겠지만 말이다. 이 선택은 상당히 영리한 것이라고 여겨지긴 한다. 40인의 공격대 팀은 확장팩 이후까지 버텨내기에는 너무 큰 커뮤니티다. 40인 공격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실제로는 60인 정도의 인원이 필요하다는 것까지 고려해본다면 말이다. 벌써 많은 공격대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 

확장팩 이전에 낙스라마스를 정복하는 공격대는 그나마 나을 것이다. 하지만 확장팩때까지 그럴 전망이 없는 공격대는? 이건 마치, 세계의 대변혁, 개벽, 종말이 다가오는 어느 시점까지 첫사랑 한 번 못해보고 처녀총각 귀신으로 죽게 될 젊은 사람들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_-;

이건 단지, 확장팩의 레어템이 오리지널의 에픽템보다 더 좋아서 불만이 나오고 어쩌고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머리를 짜고, 물약을 모으고, 죽을 힘을 다해 탱킹하고, 힐하고, 뎀딜하고, 서로 호흡을 맞춰서 하나 하나의 고비를 넘던 그 모든 행위들이 환경에 의해 '무의미'해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문제다. 실제로 확장팩이 나왔을 때 오리지널의 40인 레이드 컨텐츠가 무의미해질지 , 아닐지는 알 수 없다. 뚜껑은 열어보아야 알겠지. 그러나 그런 불안감이 조성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고, 이것은 확팩 이전에 40인 레이드 컨텐츠를 모두 정복할 가능성이 없는 중간급 이하의 공격대에게는 한층 더 심할 것이다.

이런 불안, 기대, 조급함, 허무함, 혼란. 이 모든 것이 정확히, 종말이 다가오는 세기말의 모습과 닮았다. 그래, 와우는 이제 세기말을 향한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셈이다.
  
작년 칠월말에 결성되어 화심에서 검둥까지, 그리고 안퀴라스 쌍동이제왕까지 질주했던 우리 공격대는 안퀴라스의 쑨에서 굉장히 오랜 기간을 정체해 있다가, 드디어 낙스라마스에 진출했다. 하나하나의 네임드를 킬할 때마다 여전히 느껴지는 희열을 맛보면서, 한편으로 나는 애달픔을 느낀다.

종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지금, 그 문이 닫히기 전에 우리가 좀 더 의미있는 결승점에 도달할 수 있을까? 아, 그 희망은 너무 적다. 하지만, 거의 닫혀가는 문 너머의 빛을 향해서 질주를 시작한, 어느 평범한 공격대의 마지막 이야기는 그래서 끝까지 기록할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제 더 이상 공대장이 아니라 40인 중 한 명인 나는, 아마도 40인의 마지막 이야기가 될 낙스라마스편을, 행복한 종말을 기록하는 사람의 심정으로 다시 쓰려 한다. 한 가지, 낙스라마스편이 예전의 이야기와 다른 점이 있다.

예전의 공격대 이야기는, 내가 이미 그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쓴 것이다. 그러나 낙스라마스편은 현재 진행형의 이야기다. 나는 이 종말의 드라마가 어떻게 결말지어질지 알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있을 수도 있다. 반대로 흐지부지할 수도 있다. 현재 진행형인 공격대에 대한 냉정한 비판도 들어갈 수 있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조금도 봐줄 생각은 없다. (웃음)

어쨌거나 이야기를 시작하기로 하자. 
다시 쓰는 공격대 이야기, 낙스라마스편.
아마도 그 서두는 이렇게 시작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분이 돌아왔다.

공격대 이야기 [Naxx] - 1 : 우리를 좀먹는 벌레들

언젠가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그분'은 떠났다. 그리고 그 얼마 뒤, 나 역시 공대장을 그만뒀다. 이번만큼은 어떤 설득과 약속에도 지지 (...) 않기 위해서 공개적으로 사퇴 의사를 표명하고, 사퇴서를 올렸다. 메인이 자리를 비운 상태에서 공대장까지 교체되는 시련을 준 것은 미안하고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그만 둬도 되는 때'라는 건 쉽게 찾아오지가 않는다. 공격대가 잘 돌아갈 때는 아쉬워서, 이 좋은 리듬을 깨고 싶지 않아서 못 그만두고, 공격대가 힘들 때는 더 힘들게 할 수가 없어서 못 그만둔다. 그때 그만 두지 않았다면, 나는 한 번의 휴식도 없이 교체된 메인탱커와 함께 자리를 지켜야 했을 것이고, 언젠가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오면 또 그 사람들과의 의리 때문에 그만두지 못했을 것이다. 

공대장의 역할이라는 것은 그냥 '옷'이다. 
그것도 매우 신축성이 좋은 옷. 
뚱뚱한 사람이 입으면 늘어나고, 마른 사람이 입으면 줄어든다. 
누구든 입어야 하고, 돌려 입을 수도 있다. 
그런데, 너무 오래 입고 있으면 살에 달라붙어 버린다. 
벗으려고 할때 살점도 같이 떨어지는 것처럼 고통스럽기도 하다. 
내 것, 내 사람들, 내 공격대, 내 시간, 내 추억, 내 살과 뼈.

말리는 소리에 귀를 막고 그 옷을 벗을 때, 살점이 찢겨져 나가는 것처럼 아팠다.
정말로.

- 공격대 이야기 43편 중에서.

메인탱커와 공대장이 교체되었다. 미래를 맡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전사 C마저 개인 사정으로 공대를 떠나야 했다.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서브탱커 역시 일신상의 이유로 떠났고, 노대전사마저도 공대를 쉬어야 했다. 

그런 공격대 앞에, 안퀴라스 사원이 있었다. 퀴라지라고 지칭되는 벌레들의 무리가 아제로스를 정복하기 위해 암약하는 그곳. 마치 저그에 대적하는 테란이 된 심정으로, 혹은 파워수트를 입고 벌레 외계인들 무리 속으로 뛰어드는 스타쉽 트루퍼즈의 한 장면처럼. 

나는 정말로, 이 안퀴라스 사원의 게임 디자인을 싫어한다. 안퀴라스 네임드들의 디자인 수준이 저열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디자인의 참신함, 복잡성이라는 면에서는 이전에 나왔던 화산심장부나 검은날개 둥지보다 앞선다. 쌍동이제왕을 보라. 두 네임드를 상대해야 하는데, 하나는 물리 데미지에 면역이고 하나는 마법 데미지에 면역이다. 둘의 HP는 연결되어 있고, 주기적으로 서로 위치를 바꿔 텔레포트한다. 쑨을 보라. 메인탱커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40인 모두가 탱커이자, 딜러가 되어야 하는 몹이다. 디자인 자체는 그 얼마나 혁신적인가.
 
하지만, 이 혁신성에는 감동이 없다. 마치 최고의 기교를 부려놓았지만 마음을 울리지 않는 예술작품을 보는 것처럼. 눈을 감고 생각해보자. 오닉시아를 처음 대면하는 순간은 어떠했던가. 지금껏 보았던 몬스터들과는 전혀 다른 특성, 도발 면역, 공중으로 날아올라 사방에 브레스를 뿜어내던 그 무서운 위용.  화산심장부는 어떠했는가. 모든 네임드들을 쓰러뜨리고 룬을 끈 뒤에 라그나로스의 둥지로 가서 청지기의 소환에 응해 용암으로부터 솟구쳐오르던 라그나로스를 처음 대면하는 순간이 어떠했던가? 검은 날개 둥지의 마지막 보스 네파리안은, 난이도라는 면에서는 실망스러울지 몰라도 지금껏 공격대를 이루고 있던 모든 클래스를 하나하나 외쳐부르고 저마다의 약점을 찌르면서 거기까지 도달한 공격대의 구성원들을 총화한다. 

지금은 비록 막공으로도 잡는 '쉬운' 코스가 되었을지 몰라도, 저 네임드들에는 40인에게 어려움과 즐거움을 함께 주며, 하나로 뭉쳐서 잡았다는 성취감을 주는 낭만이 있었다. 하지만 안퀴라스는 공대원을 뭉치게 하지 않는다. 안퀴라스의 디자인 컨셉은 공대원을 개별인자로 분리시킨다. 집단과 집단을 유리시킨다. 

안퀴라스의 첫번째 수문장이라고 일컬어지는 후후란을 생각해보자. 후후란은 첫 네임드는 아니다. 비교적 공략 시일이 짧은 앞의 네임드들에 비교해, 공대 전체가 일정한 자연저항 수치를 갖추기 전에는 공략이 힘든 놈이라서 많은 공대들이 후후란에서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런데 후후란에 필요한 저항 아이템을 공급할 방법은 안퀴라스 자체내에서 조달되지 않는다. 화산심장부의 화염저항 아이템이 화산심장부 자체에서 획득되는 재료로 제작되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말이다. 공격대가 공대원을 지원할 방법은 없다. '각자' 알아서 자연저항 아이템을 구해오라는 '요구'를 할 수 있을 뿐이다. 최고급의 자연저항 아이템을 얻을 수 있는 것은 필드에서 젠되는 녹색용이다. 필드의 네임드는 필연적으로 경쟁을 유발한다. 호드와 얼라이언스의 대립 뿐 아니라 같은 진영 내에서도 그렇다. 

최종 보스인 쑨은 어떤가? 쑨은 공격대를 직접 공격하지 않는다. 일정 주기로 곳곳에 발생하는 촉수들을 통해서 공격대에 타격을 입힌다. 그리고 녹색 빔 -_-; 을 이따금 쏘는데 공대원 간의 거리가 너무 가까우면 처음 빔을 맞은 공대원으로부터 가까운 공대원에게로 한층 강화된 녹색 빔 -_-;;이 연쇄 반사된다. 때문에 쑨전에 임하는 공대원들은 서로 거리를 벌려서야만 한다. 

그래, 참신하다. 이런 네임드가 전에 어디 있었던가? 하지만 참신한 만큼 비열하다. 한 공격대 안에서 모든 구성원들의 게임 적응도, 컨트롤 능력은 동일하지 않다. 사람은 원래 평등하지 않다. A를 잘하는 사람이 A를 못하는 사람을 도와주고, 그 공백만큼을 더 채워주고, B를 잘하는 사람이 B를 채워주면서 맞춰가는 것이 팀웍이고 조직이고 집단이다. 더 나은 사람이 더 못한 사람을 부축해줘서 같이 결승점에 도착했을 때 얻는 성취감을, 안퀴라스는 허용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 실수하면 모두가 죽는다. 모두가 동일한 능력을 확보하지 않으면 다 죽는다. 모두가 퀴라지처럼, 저그처럼, 클론처럼 플레이하지 않으면 다 죽는다. 

여기에는 어떤 낭만도 없다. 냉정함과 비열한 분열만 있다. 안퀴라스 사원내에 있으면, 끊임없이 NPC의 불길한 경고 소리가 들려온다. 너는 죽을 것이다, 친구를 배신하게 될 것이다, 라고. 

실제로, 안퀴라스를 공략하는 내내, 우리들은 서로를 배신했다. 많은 몹들이 플레이어를 정신지배해서 동료를 공격하게 만든다. ( -_-;; 이런 면에서는 정말이지 '정교하게' 디자인된 던전이다) 

쑨의 녹색 광선에 1차 타겟이 된 플레이어는 죽을 확률이 낮다. 첫 번째 빔의 데미지는 아주 크지는 않다. 그러나 만약 그 사람이 다른 플레이어에 너무 가까이 붙어 있었다면, 자기가 있어야할 자리를 찾지 못했다면, 그로 인해 연쇄된 두번째, 세번째 빔은 동료를 죽인다. 연쇄가 일어날 수록 데미지가 커지기 때문이다. 배신자 -_-;; 만 살아남고, 다른 사람이 죽는다. 그에 뒤따르는 비난, 분열. 공격대 킬러라고 불렸던 벨라스트라즈에 댈 바가 아니다. 벨라가 야기시킨 분열은 최소한 '클래스별' 분열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안퀴라스는 그들을 고립된 개인으로 만든다. 딱 들어맞게도, 그런 안퀴라스를 정복했을 때 얻게 되는 안퀴라스의 세트 아이템은 레이드 특화 능력이 아니라 개개인의 PVP 능력을 상향시키는 아이템으로 통일되어 있다. 

그래, 어쩌면 세상은 안퀴라스와 같을지도 모른다. 인생은 어차피 홀로 가는 여행이고, 배신, 고독, 분열은 필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게임에서마저 그걸 느껴야 한단 말인가? 어쩌면 이렇게도, 네임드 디자인부터 획득되는 아이템까지 철저하게 모두를 고립시키고 집단과 집단을, 구성원과 구성원을 유리시키는 던전이 있을 수가. 

내가 속한 공격대는 그리 잘나지도, 게임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도 않은, 평범한 수준의 공격대다. 비유한다면 취미생활을 위해 뭉친 아마츄어 오케스트라 정도라고 할까? 하지만 아마츄어 오케스트라도 때로는 감동적인 선율을 만들어낼 수 있다. 하모니라는 것은 그렇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안퀴라스가 요구한 것은 하모니가 아니라 솔리스트였다. 아마츄어들에게는 어려울 수 밖에 없는 곳이다. 

거기에 운영진의 대대적인 변화가 있었다. 하모니의 중심에 있던 사람들이 공대를 떠나거나, 책임진 자리에서 물러났다. 시련은 필연이었다. 대화는 점점 단절되어갔다. 정시에 첫 공격이 이루어지는 일은 드물어졌고, 드물게도 지휘권의 공백까지 일어났다. 아무도 지휘를 맡으려고 하지 않아서, 쑨 앞에 모인 공대원들을 그냥 돌려보낸 날도 있었다.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던 정규 레이드 일정을, 사람이 모이지 않았다고 포기했던 날도 있었다. 30명이 출석한 상태에서도 벨라를 잡겠다고 들이댔던 용감한 아마츄어들이, 35명 밖에 없으니 쌍동이 못잡는다고 해산해버리는 참담한 상황. 

몇달 간의 악몽 같은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 떠나간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공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어려운 상황을 버텨낸 사람들에게 그것은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는 희망이 되었다. 

전사 C가 돌아왔다. 노대 전사도 돌아왔다. 그리고 전사 E였던 과거의 메인탱커도 마침내 복귀를 했다. 이것이 판타지 소설이라면, 그 뒤에 남은 것은 그동안 우리를 괴롭힌 안퀴라스에 대한 복수 (Vengeance) 뿐이었을 것이다. 

그분이 돌아왔다. 
과거의 사람들이 돌아왔다. 
이것이 농담삼아 말하듯이 왕의 귀환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이것은 현실이었다. 
안퀴라스에서 상처 투성이가 된 우리들에게 
그들의 귀환은 또 하나의 시련을 안겨주었다. 

과거와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공격대 이야기 [Naxx] - 2 : 카르페 디엠 

공대의 한 성기사로서의 나는 여전히 '현재'에 속한 사람이지만, 
'전임 공대장'으로서의 나는 과거에 속한 사람이다. 
과거에 속한 사람에게는 그 나름의 책임이 있다. 
과거에 연연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과거의 교훈이 필요할 때도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걸 짚어주는 역할이었고, 
그래서 공격대 이야기를 끝까지 쓸 이유가 되었다. 

또 한 가지, 어떤 이유든 떠나간 사람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현실상의 일로 떠났거나, 레이드에 지쳐서 떠났던 사람들이 이제 돌아오기 시작한다. 
여전히 공대에 같이 남아있긴 하지만, 마음이 떠난 사람들도 있다. 
소망이 있다면, 이 글이 그 사람들에게 등대가 되었으면 싶다. 
돌아올 자리가 어떤 곳인지, 방향이 어디인지 밝혀주는 것도 
과거에 속한 사람의 책임이라고 생각된다.

- 공격대 이야기 44편: 또 다른 이야기를 위하여 중에서

우리는 낮공대였고, 그래서 밤공대에는 없는 기묘한 분위기가 있다. 아제로스의 '낮'을 지키는 사람들 중에는 두 부류가 있다. 하나는 '낮'에 게임을 할 수 있는, 혹은 '낮'에만 가능한 사람들이다. 주부라든가, 집에서는 게임을 할 수 없지만 낮에 직장에서는 게임이 가능한 특수한 직종의 종사자들이 여기 해당된다. 대체로 나이가 많은 사람들 쪽이다. 또 하나의 부류는 방학이거나 휴학중인 학생들, 취업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이쪽은 좀 더 젊다. 

전자는 대체로 공대의 고정멤버가 된다. 후자는 공대의 유동멤버가 된다. 공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전자의 결속을 단단히 하는 것과 동시에, 후자와의 소통 역시 원활해야 한다. 이 두 부류가 따로 놀게 되거나, 전자만이 공대의 주인이다라는 식의 편협한 편가르기가 된다면 공대는 반쪽이 될 수밖에 없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공대에 아주 장기적으로 머무르지 못하는 후자 인구 쪽을 그저 아이템만 먹고 가는 철새 쯤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아무리 좋은 사람들이 모여 있어도 고착된 집단은 서로를 지겨워하게 되고, 매너리즘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것을 막아주는 것이 신선한 새 피들이다. 새롭고 건강한 피들의 유입은 그러므로 환영해야 하고, 그들이 어느 정도의 기간 동안 충분히 공대를 활기있게 만들어주고 간다면 그것으로 역할은 충분하다. 

고정멤버들이 공대의 전통을 유지하고, 새로운 피들은 공대에 건강한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것. 이렇게 각자의 역할이 유지되고 서로를 존중하는 것. 이 얼마나 이상적인 조직일까. 그러나, 이상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게이머로서의 우리들은 본능적으로, 과거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른다. 지나간 시절은 다 좋았다. 과거는 언제나 뽀샵처리가 된 뽀얀 화면이거나, 그리운 세피아 빛의 이미지다. 

북구 신화의 노르넨을 소재로 쓴 유명한 일본 만화 <오! 나의 여신>에서 히로인은 '현재'를 상징하는 여신 베르단디다. 나는 이 만화를 볼 때마다 묘한 생각을 한다. 만약 정말로 과거/현재/미래를 상징하는 세 여신 울드/베르단디/스쿨드가 있다면, 절대로 사람들은 베르단디를 가장 숭배하지는 않을 거라고. 아마 백이면 백, 누구나 울드를 가장 아름답게 생각하고, 찬미할 거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현재는, 지금 내 옆에 있는 마누라와 같은 것이고 과거는 안타깝게 헤어진 젊은 날의 빛나던 첫사랑 같은 것이니까. 

지난 공격대 이야기를 쓰면서, 나는 그 글이 우리 공대에 가져올 부작용에 대한 걱정을 사실 혼자 했다. 왜냐하면 내가 내 관점에서 쓰는 이야기, 그리고 그 글의 목적 중 하나였던 '과거의 사람들이 다시 돌아올 자리를 알아볼 수 있는 등대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그것은 과거의 것들 중 가장 빛나던 순간, 우리가 이루어냈던 것들만을 골라서 쓸 수 밖에 없었다. 당연하게도 실수도, 한계도 많았다. 하지만 시간은 그런 것들을 잊게 만든다. 현재와 미래는 변할 수밖에 없는데, 과거와 다르다고 해서 안타까워해서는 안되는데, 혹시라도 그 글이 우리를 과거에 묶어두게 되지는 않을지, 걱정했다. 

그 걱정은 어느 정도 들어맞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과거와의 전쟁이 일어나게 된 것은 내 글 탓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그런 과거가 있었으니까, 가 더 정확한 이유일 것이다. 과거와의 전쟁은 공대 곳곳에서, 각각 다른 방향에서 일어났다.

가장 먼저 복귀를 한 것은 전사 C였다. 한달 남짓한 부재 후 복귀한 그는 곧 안퀴라스 사원의 전술지휘를 맡아 쑨 공략을 책임지게 되었다. 앞서서 나는 리더에게 필요한 유일한 재질은 '정확하고 냉정한 것'이라고 했다. 전사 C는 그 조건에 상당히 잘 들어맞는 사람이다. 그런데, 한 가지 더 부언해야할 것이 있다. '리더에게 필요한 재질'과 '사람들이 원하는 리더'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냉정하고, 똑똑하고, 이성적인 사람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사람들은 리더가 '똑똑하기를' 원하지만, '똑똑한 리더'를 원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말장난 같은가? 하지만 이건 진실이다. 우리는 리더가 정확하게 우리들이 가야할 길을 제시해주기를 원한다. 그러나 리더가 우리보다 똑똑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아이러니를 보았나. >_<

사람들은 원한다. 리더가 우리와 '같은' 사람이기를. 리더가 '우리'와 차원이 다른 사람이라면, 우리는 그의 뒤를 쫓아갈 뿐이지 그와 함께 걷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원하는 리더는 우리와 함께 '걸으면서' 우리를 인도할 사람이지, 우리 앞에 서서 우리에게 등을 보이고 잠자코 따라오라고 하는 사람이 아닌 거다. 어려운 일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것이 마치 몸에 밴 것처럼 쉽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타고 난 리더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보통 '똑똑한 사람'들은 리더가 아니다. 

쑨 공략의 책임자로서 전사 C가 극복해야할 과거는 바로 그런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앞에 있던 전임 지휘자인 전사 E는 말 그대로 누구에게나 '함께 걷는' 느낌을 주는 지휘자 타입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벨라를 공략할 때, 전사 E는 도적진의 제의를 받아들여 '화저가 아니라 뎀딜셋을 착용'하기를 선택했다. 우리가 아우로를 공략할 때, 전사 C는 '자저셋을 입어야 하느냐 뎀딜/힐셋을 입어야 하느냐'는 질문에 '저항셋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각자 판단에 맡길 테니 알아서 해라' 라고 대답했다. 쑨을 공략하는 과정에서 전사 C는 긴 브리핑을 거의 하지 않았다. '쑨은 개인기의 극대화를 요구하는 몹이다. 지휘자가 아무리 말을 해도 각자가 깨닫고 익숙해지지 않으면 공략은 안된다. 장기간 삽질을 하더라도 각자가 베테랑이 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가 했던 말이다. 

나는 그런 전사 C의 지휘 방식을 보면서, 때로는 당황했고, 때로는 화가 났다. 그래, 그것이 진실일 수 있다. 사실 주의 집중을 위해 온갖 임시적인 방법을 동원한다고 해도, 공략이 되는 순간은 결국 공대원 전체의 기량이 한계점을 넘었을 때인 것이 '정확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때가 올때까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옳을까? 그렇다면 지휘라는 것의 의미는 대체 어디 있을까? 안퀴라스가, 쑨이 우리에게 '개인'이 되기를 요구한다. 그렇다면 그 안퀴라스와 쑨을 넘어서는 방법은 뭘까? 몹의 디자인 컨셉대로 따라가는 길이 정답일까? 아니다.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든 게임 디자이너에게는 꿈이 있다. 물론 그들은 '답'을 마련해놓는다. 그러나 오직 하나 뿐인 답이 아니라, 다른 답들이 유저들로부터 쏟아져나오기를 기대한다. 그때에서야 비로소 자신이 만든 세계가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유저가 자신들의 뒤통수를 쳐주기를 원한다. 자신들이 만든 컨셉을 배신해주기를 원한다. 안퀴라스와 쑨이 솔리스트를 원한다고 해서, 안퀴라스와 쑨의 해법이 오직 그 길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 정반대의 길도 있다고 생각한다. 각자가 거리를 벌리고 서 있어야 한다고 해도, 공격대는 40명의 개인이 아니다. 어떤 위치에 있건 그것은 조직이다. 

개별 컨트롤이 뛰어나지 않은 높은 연령대의 게이머가 고정 멤버를 이루고 있는 우리 공격대의 속성을 생각해 볼 때, '하모니가 뛰어난 아마츄어 오케스트라'의 장점을 살리는 방향이 언제나 해법일 거라고 나는 쭉 믿어 왔다. 그런데 '알아서 해라' 라는 대답을 지휘자로부터 들었을 때의 충격이란. 갑자기 아마츄어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각자 개인 콘서트를 가지라는 명령이 떨어지는 것을 들은 기분이었다. --;;;

나는 어떻게 해야할지를 몰랐다. 내 속의 검열기가 끝없이 '과거에 묶이지 마라. 지휘자는 다른 사람이다. 옛 방식 만을 옳다고 생각하지 마라. 추억에 발목 잡히지 마라'고 한쪽에서 말한다. 또 다른 쪽에서는 '이건 과거냐 현재냐의 문제가 아니다. 원칙의 문제다. 이것이 네가 기대하는 공격대의 모습이냐?' 라고 다그쳤다. 어떻게 해야 하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대화를 멈추지 않는 것밖에 없었다. 번번이 돌아오는 '알아서 하세요' -_-;;에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질문하고, 질문하고, 또 질문했다.  네임드 도전 직전 브리핑 시간에 나는 질문할 것을 목록으로 뽑아서 -_-;; 하나하나 들이대곤 했는데, 그 중 대부분은 내가 몰라서 질문한게 아니었다. 설명이 적은 전사 C에게, 질문의 형식으로 설명을 '요구'한 것이다. 이런 내 시도가 어쩌면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난 멈출 수가 없었다. 알아서 하라는 말에 정말로 알아서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전사 C를 혼자 내버려두는 것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싸움을 멈추지 않아야 우리가 여전히 하나의 '조직'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을 것 같아서. 그렇게 확인해보지 않고 미리 포기하면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닌게 될 것 같아서. 전사 C를 위해서 한게 아니다. 공격대를 위해서 한 것도 아니다. 내가 참여하는 게임을 의미있게 만들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뿐이다.  

달라진 지휘 타입과, 거기 적응해야 하는 공대원들. 그 사이에서 정답은 뭘까? 누가 변해야할까? 나는 다른 공대원들에게는 이렇게 말해야 했다. '한 사람이 변하는 것보다는 39명이 맞춰가는 것이 더 쉽다. 지휘 방법이 달라졌다면 달라진 것에 적응하는 것이 공대원의 의무다. 전사 E를 믿었던 것처럼, 전사 C를 믿어야 한다. 그러면 언젠가 새로운 호흡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그건 반만 진실이다. 지휘자가 변해야 하느냐, 39명이 변해야 하느냐? 서로 변하는 것이 정답이다. 달라진 지휘자의 개성을 존중하는 것과 그 지휘자가 변하지 않는 것은 다른 문제다. 전사 C와 전사 E가 같아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럼 재미가 없잖아 -_-;; 하지만 전사 C는 지휘자가 아니던 과거의 자신과는 달라져야 한다. 39명과의 적극적인 충돌과 대화를 통해서 전사 C만의 방식이 확고해질 때, 거기서 신뢰가 탄생하고 비로소 타입이라는 것이 만들어진다. 이런 충돌과 변화가 없는 상태에서 '나만의 방식'을 주장하는 것은 공염불이다. 

변화, 충돌. 길고 긴 고통의 시간. 조금씩 바뀌는 사람들. 우리는 종종 잊는다. 우리가 처음 출발선상에 섰을 때, 서로가 서로에게 모두 낯선 사람이었다는 것을. 아무도 처음부터 친숙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그걸 잊고, 새로운 사람을 경계한다. 사람은 누구나 다 똑같다. '옛사람' 중에도 바보, 악당, 묻어가는 사람은 있다. '새사람' 중에도 성실한 자, 열성적인 자, 현명한 자는 있다. 옛것이 무조건 옳고, 새것이 무조건 그르지도, 그 반대도 아니다. 옳은 것, 그른 것, 좋은 것, 나쁜 것은 과거와 현재에 귀속된 것이 아니다. 그건 그 자체로 옳고, 그르고, 좋고, 나쁜 것일 뿐이다. 옛날이어서 좋은 것이 아니다. 좋았던 모든 것이 옛날에 속한 것도 아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옛것이 모두 나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과거에 발목 잡히곤 한다. 우리가 과거에 사로 잡혀 있을 때, 아직 현재를 사랑할 수 있는 어떤 빛도 보이지 않을 때, 잘 들어맞게도 우리는 이미 잡았던 과거의 네임드인 쌍둥이 제왕에게 발목을 잡혔다. 쑨을 공략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쌍동이를 제대로 잡느냐 못잡느냐가 문제일 정도로 공대의 기량이 후퇴했다. 전사진의 급격한 이탈과 공백, 그리고 운 나쁘게도 때를 맞춘 베클로어 블리자드 버그로 인한 고통의 시기였다. 누군가, 자조섞인 어조로 그런 말을 하기도 했다.

"우린, 삼류공대에서 시작해서 잘하는 공대가 되었는데, 이제 다시 삼류공대가 된 것 같아." 

그래, 우리는 그렇게 과거와의 싸움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하지만 아마 우리들 중에 가장 과거와의 싸움을 격렬하게 치른 사람은 그일 것이다. 전사 C의 복귀에 이어 조만간 복귀하게 되어 있던 전사 E. 간간이 접해들은 공격대의 현재 소식, 그리고 시간이 나고 공대에 자리가 남을 때 참가해서 지켜본 공격대의 현재 모습을 보면서 그는 마음 아파 했다. 때로는 화를 내기도 했다. 그는 과거에 공격대를 떠난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그들이 돌아오기를 원하고, 그들이 있어야만 한다고 말했다. 너무도 간절하게. 

나 역시 과거를 사랑했고, 과거의 사람들이 가졌던 장점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과거를 소환할 수는 없었다. 전사 E가 돌아올 경우, 안퀴라스 이후 낙스라마스의 공략 지휘를 책임지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황이었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공대 인원의 1/4 가량이 이미 새로운 사람으로 갈린 마당에서, 과거의 그림자를 아직도 어깨에 메고 있는 사람이 지휘를 맡아서는 안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전사 E로부터 과거의 망령을 지워내줘야 했다.

나: 왜 그렇게 옛날 분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시나요? 그분들은 대부분 게임을 더 이상 할 수 없거나, 다른 일이 있어서 떠나신 분들인걸요. 돌아올 수가 없어요. 설령 돌아오신다고 해도, 그건 그분들이 개인 생활을 잘 처리하고 게임을 다시 할 수 있게 될 때 자연스럽게 각자 돌아와야 하는 문제지, 공대를 위해서 그분들에게 복귀를 유도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데요.

전사E: ......

나: 제가 걱정하는 건, 전사E님이 옛분들의 복귀를 바라는 그 마음이 아니고요. 그런 마음 반대편에는 현재의 사람들에 대한 불신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에요. 현재의 분들과는 잘해나갈 자신이 없으신가요?

전사E: 그건 아니지만요. 물론 현재의 분들도 잘 해주시겠지만, 그래도......

나: 우리, 처음부터 호흡이 잘 맞는 팀이었던 거 아니에요. 열심히 노력해서, 다 같이 애써서 그렇게 된 거죠. 지금 분들도 마찬가지에요. 옛사람들에게 준 정성만큼 다시 쏟아보세요. 과거는 과거에요. 발목 잡히지 마세요. 

언제나, 나의 반쪽은 과거에 속해 있다. 나 역시 사람이고, 게이머이기에 과거를 사랑한다. 그렇게 사랑하는 과거를 부정해야 할 때, 가슴 한 구석이 저린다. 하지만 과거로부터 우리가 가져올 것은 교훈과 추억의 힘뿐이다. 우리가 사는 것은 현재다. 어떤 치장도 하지 않은 채, 날 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평범하게 앉아있는 베르단디.

이 베르단디를 사랑하는 것 밖에는, 울드를 이길 방법은 없었다. 전사 C에게 전사 E가 되라고 말하지 않는다. 현재의 전사 C가 되어달라고 할 수밖에 없다. 전사 E에게 영원히 과거의 표상으로 남으라고 할 수 없다. 돌아온다면, 그는 베르단디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건 과거에 대한 배신이 아니다. 현재를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내일이면 어제가 될 오늘을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울드와 베르단디 양쪽에게 최선을 다하는 방법이 어디 있으랴. 오늘의 베르단디는, 언젠가는 울드가 될 텐데.

과거에 발목 잡히지 않기. 그렇다고 과거의 교훈까지 다 잊지는 않기. 전통과 원칙을 유지하는 것과 추억에 발목 잡히는 것의 차이를 명확히 알기. 과거와의 전쟁은 그렇게 극복하는 수밖에는 없다. 현재를 즐겨라. 카르페 디엠.

과거와 싸우는 동안, 우리는 정체되어 있었다. 진도는 쑨 앞에서 멈춘 채였다. 그리고 어느 날. 전사 C가 지휘봉을 잡고 안퀴라스의 쑨 앞에 모였다. 그날, 전사 E가 정식으로 공대에 복귀했다. 우연찮게도 노대 전사 역시 그 무렵 개인 일을 정리하고 공대에 복귀했던 참이다. 그리고, 전사 E가 떠날 때 동시에 공대를 떠났던 과묵한 서브탱커 전사D가, 놀랍게도 몇달만에 게임에 접속했다. 그동안 건강 문제로 병원에 입원해있었다고, 소식을 전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당장 준비물을 챙겨 그는 안퀴라스로 날아왔다. 누구보다도 전사 E가 가장 기뻐했다. 새 사람들과 옛 사람들이 모두 함께 쑨을 향해 달렸다.

그날, 우리는 쑨을 잡았다. 몇 달 동안 우리를 그렇게 놓아주지 않던 촉수의 신을. 누군가가 말했다.

"우리가, 그동안 쑨 잡을 수 있었는데 전사 E님과 D님 오면 같이 잡으려고 지금껏 기다린 거에요."

우리는 모두 웃었다. 그래, 정말로 '그랬던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날 이후, 전사 D는 게임에 접속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대로 영원히 와우를 떠난 것인지도 모른다. 쑨을 잡던 그날은, 마치 우리 공대의 과거와 현재가 서로 마음을 열고 손을 잡은 날이었던 것 같다. 과거와 현재가 서로를 끌어안았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한 고비를 넘어선 것이다. 그리고 전사 D가 작별을 고한 것처럼, 과거는 마지막으로 한 번 큰 빛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났다. 

우리는 이제 현재에 서서, 미래로 간다. 
월드오브워크래프트의 마지막 40인 공격대 던전
켈투자드의 아성, 하늘에 뜬 언데드들의 성채
낙스라마스로.


부록: 현재 안퀴라스 사원은 전사 C의 지휘로 진행하고 있는데, 최근 전사 C는 쑨 페이즈 2에서 새로운 진형에 의한 전술을 제안해서 공격대에서 실험을 해보았다. 전사진의 출석이 불안정할 때 원형진으로는 페이즈 2의 발톱 촉수 지역 방어가 잘 안되는 점 때문에 새롭게 나온 부채꼴 진형이다. 보통 페이즈 2에서 쑨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서서 구역을 나눠 지역 방어를 하는 식인데, 이 전술에서는 11시부터 12시, 1시를 아우르는 부채꼴 진영을 이루며 그 안에만 공대원이 서있는 밀집 방어 형태가 된다. 빠른 촉수 처리가 안될 경우 원형진에 비해 상당히 전멸 위험이 크다. 하지만 방어해야할 범위가 작고 화력 집중이 용이한 장점이 있다.

다른 공격대에서도 많이 쓰고 있는 방법일지도 모르겠지만, 늘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고, 연구하기를 즐기는 전사 C의 장점이 잘 살아난 지휘였다고 생각한다. 아래 영상은 페이즈 2 부채꼴 진영으로 쑨 공략에 성공한 날의 동영상이다. 

공격대 이야기 [Naxx] - 3 : 정치와 군사의 이중주곡
공격대 이야기 [Naxx] - 4 : 시간이 우리를 하나 되게 하리라
공격대 이야기 [Naxx] - 5 : 그리고 또 우리를 하나되게 하는 것들
공격대 이야기 [Naxx] - 6 : 공대의 보물

맥스나는 거미지구의 윙보스로, 거미형으로 생겼다. 이 몹이 쓰는 기술이나 이미지를 보면,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쉘로브를 연상시킨다. 맥스나는 10초 간격으로 세 개의 스킬을 구사한다. 

첫번째. 공대원 중 랜덤으로 세 명을 (아마도 제 1위 어그로 확보자를 제외한 사람들 중에서) 고치로 휩싸서 가둔다. 고치에 휩싸인 사람은 아무 행동도 할 수 없다. 심지어 무소불위의 권능을 가진 성기사의 '무적'조차도 쓸 수가 없다. 그리고는 고치에 휩싸인 채 처절하게 버둥거리다가 -_-;; 주기적인 자연데미지를 받으면서 죽어나자빠진다. 

두번째, 새끼 거미 다수를 소환한다.  뭐 이건 자주 보던 기술이라 감흥은 없다. -_-a

세번째, 거미줄 뿌리기라는 스킬을 사용한다. 이 스킬은 방안에 있는 '전원'을 8초간 행동 불능으로 만드는 것이다. 역시 무적조차 통하지 않는다. 이 행동불능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오직 '죽은 자' 뿐이다. -_-;;

따라서, 맥스나 공략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10초 간격으로 사용되는 이 세 가지 스킬들에 어떻게 대처하는가다. 

첫번째 고치는, 고치에 갇힌 사람들은 자력으로 벗어날 도리가 없다. 그대로 두면 반드시 죽는다. 고치에 갇힌 사람들이 벗어날 방법은 단 하나인데, 고치 자체를 외부에서 파괴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원거리 딜러로 구성된 구출조가 고치를 파괴하는 역할을 맡고, 일부의 힐러가 고치에 갇힌 사람들을 치료해서 구출될때까지 버티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두번째, 새끼거미 소환은 그 자체로만 따지고 보면 그다지 어려운 기술은 아니다. 와우에 네임드들이 많이 보이는 수법이다. 광역으로 빠른 처리가 답이다. 하지만 이 소환이 까다로운 이유는 고치 - 거미소환 - 거미줄 뿌리기의 세가지 스킬이 10초 간격으로 쓰인다는 점 때문이다. 즉, 대단히 빠른 처리를 하지 않으면 이 새끼거미들이 살아남아 10초 후 전원이 행동불능에 빠졌을 때 힐도 받을 수 없고 물약도 마실 수 없는 공대원들을 학살하게 될 것이라는 점. 그리고 역할이 잘 나눠져 있지 않을 경우 거미 처리에 구출조나 힐러들이 방해를 받아 고치에 갇힌 사람과 탱커를 살리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소환 그 자체는 단순한 것이지만, 이 소환이 고치와 거미줄 뿌리기 사이에 배치된 것으로 난이도를 더 올리고 있다.

세번째, 거미줄 뿌리기는 맥스나의 최고절기 -_-; 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시전된 상태에서 메인탱커는 아무런 힐도, 능동적 방어스킬도 쓸 수 없는 채로 맥스나의 모든 데미지를 한 몸으로 받아야 한다. 그리고 살아남아야 한다.

이 세가지 패턴에 적응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기본'일 뿐이다. 맥스나는 체력이 낮아진 후반부에 후후란처럼 '광폭화' 한다. 데미지는 겁나게 세지고, 위의 세 가지 기술은 그대로 사용한다. 가장 어려운 것이 광폭화된 상태로 거미줄을 뿌릴 때다. -_-a 
 
각설하고, 우리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내에 맥스나에 대한 브리핑을 받고 한 번 정도 돌입을 해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모두 공대창을 눈빠지게 집중한 가운데 메인탱커가 설명을 시작했다. 예의 '고치' 전술에 대한 설명이었다.

그분: 맥스나는 
그분: 랜덤으로
그분: 세명을
그분: 고추로 만듭니다
.

......
처음 그 말이 나왔을때, 공대원들은 예의 바르게 '못본 척' 하려고 했던 것 같다. 혹은 어쩌다 나온 오타 정도로 생각하고 참으려 했다. (전에 말한 대로, 전사E는 오타가 매우 심하다) 그러나...

그분: 고추가 되면
그분: 혼자힘으로는 
그분: 살수가 
그분: 없습니다.
그분: 고추 상태에서는
그분: 물약도
그분: 마실 수가 
그분: 없습니다.

... 점점. 우리들은 이것이 '외면해서' 될 상황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것은 어쩌다 한 번 일어난 오타가 아닌 것이었다. (....)

그분: 따라서
그분: 원거리 딜러로 구성된
그분: 구출조가
그분: 고추를 
그분: 극딜해주셔야 합니다.

.......참다 못한 한 나이 지긋한 공대원이 일반대화창으로 한 마디 하고 말았다.

공대원: -_-;;; 아주 씨를 말려버리자는 작전이구만.

ㅠㅠ.... 그렇다. 방금 전까지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네임드 앞에서의 긴장감은 썰물처럼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메인탱커는 공대창에서 열심히 '고추점사 고추극딜'을 브리핑하고 있는데, 공대 대화채널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ㅁ-;;;

공대원: -ㅁ-;;; 18금 오타네
공대원: 그럼 맥스나는 남잔겨?
공대원: 이름봐선 여잔줄 알았더니 ㅠㅠ
공대원: 그나저나 전사E님 아직도 눈치 못채고 계셔. ㅠㅠ
공대원: 브리핑 몰입 중이심. ㅠㅠ 채널 대화 안 보고 계심 ㅠㅠ
공대원: 나 겜방에서 지금 웃는다고 사람들이 정신 나간 줄 알아요. 나 죽네 ㅠㅠ

정말로 신통하게도 (...) 메인탱커는 대화창에서 저 정도의 말이 오가는데도 자신의 실수(...)를 눈치채지 못하고 브리핑만 열심히 했다. ㅠㅠ 그리고는 안 그래도 웃다가 반쯤 죽은 공대원들에게 마지막 크리티컬 히트를 날렸다. 공대원 중 한 명이 고치에 걸린 사람들이 자신의 파티를 알리는 외침 매크로를 만들자고 제안하고 '몇파 누구누구 고치에 대롱대롱!' 이라는 예문을 알려준 뒤의 일이다. 

그분: XX님 말씀대로
그분: 전부 매크로를 하나 
그분: 만드세요
그분: 고추에 걸린 분들은
그분: 몇파 누구 
그분: 고추에 메롱메롱
그분: 이라고 외쳐주세요

공대원들: ......................................ㅁㄴㅇㄻ;ㄴ얾ㅇㅁㅇㄻ;ㄴㅇㄻ -ㅁ-
ㅠㅠ 고추도 미치겠는데 고추에 대고 메롱메롱 ㅠㅠ

믿기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저렇게 브리핑을 마치고, 공대원들이 웃다가 반쯤 죽어갈 정도가 되었는데도, 레이드 종료시까지 메인탱커는 자신의 오타를 눈치채지 못했다. -_-;; 그리고는 평소와 다름없이 결연하게 "자, 일단 감 잡아보기 위해 한 번 들이대보겠습니다. 5,4,3,2,1 ㄱㄱ " 외치고 든든한 등짝을 공대원들에게 보이며 맥스나를 향해 달려갔다. 나머지 39명은 하도 웃어서 눈물이 찔끔난 채로 그 뒤를 따라 달려갔다. ㅠㅠ 그리고 당연하게도 전멸했다. 맥스나는 아마 '진지한 얼굴로 달려오는 한 전사'와 그 뒤에 미친놈처럼 히죽거리면서 달려오는 다수의 인간들을 보고 의아했을지도 모르겠다. ㅠㅠ 

그날 레이드는 그렇게 종료됐다. 일주일에 낙스를 딱 이틀 가는 우리 공대로서는 낙스 진입 첫 주가 고추 메롱메롱과 함께 막을 내린 것이다. 

이날의 사건에는 여러가지 후일담이 있다. -_-a 

레이드가 끝난 뒤, '아까 대박 오타 내신 거 정말 모르세요?' 했더니 그분 ( -_) 왈.

그분: 넹? 
그분; 제가
그분: 또 무슨 오타를 냈나요?


... 라고 했다던가. 상황을 설명해주자 커어어어억 하고 비명을 토하더니 한참 후에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다른 사람에게도 정말 자신이 그런 오타를 냈느냐고 물어봤다던가 . -_-a 

나중에 공대 채널에 고백하기를 '사실은, 저, 그날 정말 정신이 없어서. 고치가 아니라 '고추'인 줄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ㅠㅠ' 했다던가. (...)

전사 C가 문득 '근데 생각해보니 고추 메롱메롱이 그나마 낫지 고추 대롱대롱은 더 웃겼을 것 같아요' 라고 말해서 또 많은 사람을 아연하게 했다던가 -_-;;

그날 이후 맥스나전에 공대원들이 사용하는 매크로중 많은 수가 '고추 메롱메롱'이 되었다든가 하는 .. 무수한 -_-;;; 일화가 있다. 

그날 너무나 많이 웃던 와중에, 한 공대원이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 나에게 말했다.

"공격대 이야기 낙스편 써주세요."
"... 그리고 이 이야기 꼭 넣어달라구요?"
"당연히!" 

(네. 그래서 시작된 속편인 겁니다. 이거 고자질하려고요 -_)

낙스 첫주는 그렇게 갔다. 우리는 그 다음주에 다시 맥스나를 만나기로 하고 낙스를 떠났다.하지만 정말 걱정이 되었다.  맥스나 앞에만 서면, 분명히 고추 메롱메롱이 떠올라서 집중이 안되고 웃음이 나올 텐데 .... 과연 잡을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들은 메인탱커를 원망했다.

공대원: 만약에 우리가 맥스나 못잡으면 다 고추 때문임!
그분: ㅠㅠ
그분: 죄송해요
그분: 조심할게요.

그러나.. 그분은 그뒤로도 여전히 이따금 고치를 고추라고 치고 (아니, 사실은 고치라고 칠 때가 더 적고), 그 외에도 네임드마다 적절한 오타 하나씩은 생산하여 공략 중 지나치게 긴장하고 피로한 공대원들의 심신을 달래주었다. -_-;;;;

성실하고 진지한 타입의 메인탱커에게 만약 저런 헛점이 없었다면 때로는 지루하고 고지식해보이기도 했으리라. 우리 공대원들은 언제나 메인탱커의 오타를 기대하고 또 기대한다. (...) 이 일화를 쓰게 되면, 그 챕터의 제목을 뭐로 해야할까 고민했더니 공대장이 위의 제목을 추천해주었다. 그분의 약점은 바로 우리 공대의 보물 -_-;;;; 이라고. 적극적으로 채택했다.


자, 그래서 이제 맥스나 대면식을 끝냈다. 그 다음주, 우리들은 맥스나를 잡을 수 있었을까? 맥스나는 공략 포커스가 여러군데라는 면에서 우리 공대의 타입에 잘 맞지 않는 네임드로 보였다. 게다가 고추 메롱메롱이라는 약점이 있어서 집중이 될지도 의심스러운 상황. 

그러나, 레이드는 언제나 예측 불허.
그리하여 공략은 그 의미를 갖는다.

- 다음주 이 무렵에 계속. (...) 
대충 주말쯤에 한번씩 올릴까 합니다. 현재 진행형 이야기다보니. ^^

공격대 이야기 [Naxx] - 7 : 믿기, 그리고 속이기

낙스 진입 첫 주는 쾌조였다. 하지만 즐거운 맥스나 공략으로 넘어가기 전에, 사실 이 쾌조의 첫주가 시작되기 전 물밑에서 일어났던 진통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다. 그것은 바로, 공격대의 일정 문제로 인한 진통이었고, 진통의 주당사자는 새로운 투톱. 낙스라마스의 전술지휘자인 전사E와 신임 공대장이었다. (... 나중에 원망들을지도 모르겠지만 서두부터 봐줄 생각은 없다고 미리 선포해놨으니 뭐... -_)

우리는 주 3회 레이드를 뛰는 공격대다. 처음 시작은 화산심장부였고, 화산심장부 공략 초기에 오닉시아 공략을 병행했으며, 화심과 오닉 정복 후 검은날개 둥지를 추가하여 공략했다. 그러다가 안퀴라스 사원이 추가까지 추가되었지만 인던 보스 공략 시기에 주 1회 추가 일정을 임시적으로 유지했던 것을 빼면 만들어진 이래 계속해서 주 3일 레이드를 뛰는 공격대다.

사원 막바지 무렵에 오닉시아가 공식일정에서 제외되었고, 불과 얼마전에야 화산심장부 역시 공식일정에서 제외시켰다. 그러고도 여전히 검은날개둥지, 안퀴라스사원, 낙스라마스라는, 세 개의 인던을 주 3일 총 12시간 안에 해결해야 한다. 이중 파밍코스에 해당하는 검은날개둥지와 사원 쌍둥이까지를 하루에 끝낸다고 치더라도, 여전히 난제인 사원의 쑨과 낙스라마스 도전 일정이 턱없이 모자라다. 낙스에서 킬하는 네임드가 늘어날 수록 절대 시간에 쫓기게 될 것은 뻔했다. 대체 저 한정된 시간 안에서 어떻게 시간을 배분해야 파밍과 공략이 동시에 원활해질까?

낙스 진입시에 결정된 스케줄은, 검은날개둥지를 격주로 가는 것이었다. 즉 한 주는 낙스 1.5일. 사원 1.5일. 그 다음 한 주는 낙스 1일. 사원 1.5일. 검둥 0.5일 식이었다. 많은 공대원들이 둥지템의 파밍이 끝나서 둥지레이드 중 나오는 아이템 중에 태반이 '먹을 사람이 없어' 결정화되는 상황이지만, 계속해서 생기는 결원을 보충하기 위해 새로 받은 신입들의 장비는 강화를 시켜야 하고 아직 일부 아이템의 파밍이 덜 끝난 기존 공대원들 역시 배려하기 위해 애를 쓴 필사적인 타협안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타협안은 양쪽을 다 만족시키기도 하는 반면, 양쪽을 다 불만족시키기도 한다. 낙스 진입 첫 주, 네임드 2킬의 기쁨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그 불만이 표면화되었다. 당장 그 다음 주는 맥스나 트라이를 위한 절대 시간이 부족했다. 격주로 검둥에 가야할 주이기 때문에 낙스에 투자할 시간이 적었던 것이다. 

가장 먼저 불만을 드러낸 것은, 바로 낙스 지휘를 맡은 전사E였다. 그는 조금 더 많은 시간을, 조금 더 많은 기회를 원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승리를 책임져야 하는 사람의 눈에는 승리를 좀 더 당길 수 있는 방법이 눈 앞에 있는데 그걸 시도하지 못하고 주춤거리며 보내야 하는 하루, 한 주가 그야말로 피말리는 시간이다. 더군다나, 전사 E는 안퀴라스 사원의 막바지, 쑨의 공략 지휘를 하던 그때에 개인사정으로 잠시 공대를 떠나야 했다. 만약 그때, 공격대가 좀 더 일찍 과감하게 화산심장부를 포기할 수 있었다면 쑨의 공략에 투자할 시간이 '좀 더' 있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채 마치지 못한 과업을 남겨둔 채 떠나는 찜찜함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몇달이 지나 돌아왔을 때 여전히 제자리 걸음 중인 공대를 보며 느꼈던 참담한 심정도.
  
또 다시, 낙스에서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다. 아마도 전사 E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하루라도 빨리, 할 수 있을 때 최대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안에 어떻게든 빨리 이 임무를 마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그러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시간이다. 그는 신임 공대장을 통해서 공대원들에게 '시간'을 요구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난색 뿐이었다.

일상생활도 해야 하는데 주 4일 레이드는 무리다... 
서버 특성상 검은날개 둥지 막공까지도 제법 많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그래도 화심과 달리 둥지 템을 막공에서 파밍한다는 것은 어렵다...
이 상황에서 신규자 때문이라도 둥지를 버릴 수도 없다... 
사원 역시 , 특히나 쑨과 아우로의 경우에는 사원 아이템의 핵심을 떨구는 몹이라 버릴 수 없다.... 
그런 공대원들의 다양한 의견 속에서 결국 채택된 것은 격주 둥지 안이었다. 

낙스 진입 전부터 지휘자가 결정된 이후 신임 공대장과 전사 E 사이에는 이 문제로 인한 신경전이 계속되어왔다. 이제야 고백하는 거지만 ( -_) 처음 이 투톱을 '맞선'시켜준 이후, 전임이라는 죄로 나는 양쪽 모두에게 적절한 고문 -ㅠ- 역할을 해줘야할 책임이 있었다. 내 앞의 공대장이 내게 대나무숲이 되어주었던 것처럼. 신임 투톱에게도 가끔은 그런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공대장에게는 "믿고 맡기고 할 수 있는 지원을 다 해줘라. 그러면 켈투자드가 쓰러져 있을 것이다" 라고 전술지휘자를 소개했고. 전사E에게는 "나와 비슷하면서도, 훨씬 더 끈기있고 침착하게 공대를 운영할 사람" 이라고 신임 공대장을 소개해주면서 중매를 섰건만, 양쪽 다 반신반의한 것인지 (... 아니 내가 그렇게 매파로서 신용이 없었나! - 생각해보니 분하군. 버럭!) 초반에는 제3자의 눈으로 볼때 대화가 상당히 안 통하는 투톱이었다. -_-;; 같은 화제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도 서로 엉뚱한 말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그 태반은 전사 E의 오타를 공대장이 해석하지 못한 탓이다. 가끔은 내가 통역 ( -_)을 해줘야할 때도 있었다. 일명 메인탱커어(語) 동시통역 1급자격증 보유자로. (...) 

낙스 진입 전부터, 이 투톱은 종종 낙스 준비에 관한 회의를 한 후에 각자 나를 대나무숲 삼아 탄식을 했다.  둘 다 차분하고 끈기있고 조직활동의 기본적인 도리를 아는 사람들이라 그 탄식이라고 해봤자 매우 조심스러운 것이었지만, 그런다고 눈치 못 챌 내가 아니다. 낙스 문제로 회의만 마치고 나면 무슨 말이 오갔는지 전사 E는 한숨을 푹 (...) 쉬고, 공대장은 귓말로 "전사 E님이 답답해하죠...?" 라면서 자조섞인 질문을 하니 둔탱이가 아니고서야 모를 수가 없다. 

전사E는 공대장이 뭔가 획기적인 결단을 해서라도 낙스를 위한 과감한 일정개혁을 해줘야 지휘자로서 의욕이 생길 텐데 그런 게 없어서 답답해하는 눈치였고, 공대장은 그런 개혁이 공대장 혼자 결정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라 공대원들을 설득하고 가장 현실적인 방안을 마련할 절차와 시간이 필요한 법인데 지휘자는 당장 성과가 보이는 결단을 해주지 않는 것이 불만인 눈치니 답답하기도 하고 무력감도 느꼈던 것이다.  비록 말은 "그래도 공대장님이 결정하시면 따라야죠" 하고, "메인탱커가 의욕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죠." 라고들 했지만 서로 각자 나름대로 외롭게 공대를 이끌어가야 하는 중추들인데 철없는 (...) 공대원 뿐 아니라 투톱의 상대편까지도 자신을 완전히 이해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뭐 한숨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사실, 대화가 잘 안 풀린 것이 오타 때문이라는 것은 반쯤(만) 농담이고, 실제로는 운영자로서의 공대장과 지휘자로서의 메인탱커가 처한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오는, 필연적인 의견 차이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운영자는 공대의 '보루'와 같다. 모든 것이 잘 돌아갈 때는 운영자의 영향력은 없다. 적을 수록 공대는 잘 돌아가는 거다. 운영자의 운영기술이 정말로 돋보이고 필요할 때는 '안될 때'다. 결국 공대장은 늘 '실패'할 경우를 생각해야 하고, 대비해야 하고, 안되는 부분을 고치고 수리해야 하는 사람이다. 반면 전술지휘자는 일종의 깃발과 같다. 그는 앞서서 길을 뚫어야 하는 사람이다. 실패를 생각해서는 안된다. 늘 성공만을 생각하고, 그걸 위해 노력해야 한다. 두 사람이 낙스 일정에 대한 의견 차이를 보였다면, 그건 각자가 자기 역할에 충실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충실했기 때문에 차이가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그 대립은 근본적으로 건강하다. 
하지만 건강하기 때문에 긍정적인 반면, 건강하기 때문에 어리기도 하다. 그리고, 냉정하게 평가한다면, 그 어리고 서툰 커뮤니케이션의 책임은 공대장 측에 좀 더 있다고 나는 평가했다. 왜냐하면, 투톱은 분명히 서로를 동등하게 존중하고 상대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배려해야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공대장이 좀 더 많이 배려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 그래야 하는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공대장이 좀 더 많은 책임을 져야할 자리라서다. 군사적 영역이든 정치적 영역이든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책임은 공대장에게 있다. 쉽게 말하자면 공대장은 선출직이고 메인탱커는 임명직에 가까우며, 공대장은 공대원들을 대신해서 메인탱커를 '부려먹고' 있는 입장이다. 누가 누구를 더 배려해야 하고, 누가 이 커뮤니케이션의 주도권을 잡아야 하는가? 답은 공대장이다.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 말싸움에서 이기라는 소리가 아니다. 원하는 방향으로 대화가 이루어지도록 관계를 만들어나갈 책임이 공대장에게 좀 더 많다는 뜻이다. 신뢰가 쌓여야할 관계에서, 신뢰를 쌓지 못한다면 원하는 방향으로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노력해도 안됐다면 그건 방법이 서툴렀기 때문이다.

신뢰를 쌓기 위해서는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 나는 결국 속이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보고 싶어하는 것을 보게 해주는 것이 가장 뛰어난 정치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신뢰를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상대를 속여야 한다. 상대를 정말로 속이기 위해서는 자신도 속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신뢰의 기본은, 내가 당신의 적이 아니라 아군이라고 믿게 하는데서부터 출발한다. 운영자로서 절차와 규칙을 존중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메인탱커의 급진적 요구를 받아들일 것인가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할 문제가 아니다. 지난 번에도 말했다시피, 결국 정치는 둘 다 해야 하는 것이다.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상대로 하여금 나를 믿게 했는가, 믿지 못하게 했는가가 좀 더 핵심이다. 공대장이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여준다' 라는 느낌은 공대원 개개인에게는 꽤나 중요하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을 수록 그 리더는 말하자면 그릇이 큰 셈이다. 모든 것을 다 담는 바다 같은 그릇이 되는 건 인간으로서 무리겠지만, 최소한 40명 중에 가장 서로 믿고 의지해야할 투톱의 상대편에게는 그런 신뢰가 무엇보다도 우선이 되어야하는게 아닐까. 왜 처음 이제 호흡을 맞추는 단계에서부터 '아니다' '안된다' '기다려라' 라는 말부터 했단 말인가. 설령 결과는 똑같더라도, 나 역시 그래야할 필요성을 느끼고, 그렇게 하고 싶지만, 지금 이런 저런 문제가 있어서 조금 더 조율과 조정이 필요하니 정말 미안하지만 조금만 기다려달라, 라고 믿게 하지 못하고, 왜 '안된다' 부터 시작했단 말인가. 운영자는 운명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보수적이기만 한 공대에는 활기가 없다. 운영자가 하지 못할 것을 해주는 사람이 지휘자다. 왜 그 기세를 꺾는단 말인가. 살려주면서, 진정을 시켜야 한다면 최대한 달래가면서, 가진 바 능력을 최후의 한 방울까지 다 빨아먹지 못하고! (....)

.... 라는 뜻으로 이래저래 이야기해줬다. (.....물론 말할땐 저렇게 노골적으로는 안했던 것 같다 - 아하하하하 -_-;;; 하지만 다 저렇게 알아들었겠지 뭐.)

안 그래도 뭔가 이야기를 잘못 풀었다고 생각했던 공대장은 다음날 다시 메인탱커와 이야기를 한 모양이지만, 당장 분위기가 크게 바뀌지는 않은 것 같다. 그도 당연한 것이, 신뢰는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이지만 쌓는 것은 일조일석에 되는 것이 아니니. 그렇게 해서, 검둥 격주의 어정쩡한 일정으로 우리는 낙스 첫 주의 공략을 마친 것이다. 

자신의 정치적 서투름 -_-;; 에 대해 우울해하는 공대장에게 나는 한 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언젠가 한 번, 모두가 반대할때 메인탱커를 지지해주라고. 신뢰는 천천히 쌓이지만 그 실체가 조금씩 두꺼워지는 것은 한 순간의 계기로도 가능하다. 낙스를 공략하는 과정에서 메인탱커가 혹시 "무척 이렇게 하고 싶은데 공대원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위험한 제안"을 하게 되거든(성격상 그럴 확률이 매우 높다고 봤다), 설령 그 '위험성'에 대해 공대장도 자신도 같은 판단이 들지라도 실패의 뒷수습이 가능하기만 하다면 공대원들을 전부 제물로 던지고서라도 (...) 꼭 밀어주라고. 그리고 실패하면 같이 책임을 져주라고. 그렇게 신뢰는 쌓여가는 것이고, 그것이 하루의 레이드 실패, 일주일의 일정 차질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고.

그렇게 해서 진입한 낙스였고, 그렇게 해서 시작된 첫 주의 일정이었다. 느린 출발이긴 하지만 만족할만한 성과였다. 그러나 이 투톱을 골치아프게 만든 문제의 근본원인이 완전히 사라지게 된 것은 아니다. 아니,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래, 모든 문제는 시간이다.

우리는 '과거'와 전쟁을 해야 했고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주는 것은 '시간'이었으며,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와우는 '세기말'을 앓고 있다.
모든 문제는 시간으로 귀결된다. 
그래서일까.
낙스라마스에서 나오는 에픽 아이템들의 이름을 보면
묘한 감상에 젖게 된다.

이상의 종말
파멸의 전조
왕의 몰락

그래, 정말로 우리들은 세기말에 서있는 모양이다.

공격대 이야기 [Naxx] - 8 : 죽은 자 가운데서 홀로 일어나

뭐, 앞서 이야기한 '시간으로 인한 어려움'보다 시간상으로는 약간 뒤, 혹은 거의 동시에 병행된 일이지만, 우리를 어렵게 만들었던 내적인 문제와 그 해결책으로 택했던 것에 대한 토로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조금 시계바늘을 빨리 돌려보자.

10월 30일 월요일. 
우리들은 고추  고치의 대왕거미이자 낙스라마스 거미지구의 윙보스인 맥스나 앞에 다시 모였다. 맥스나 도전 - 이라기보다는 첫인사에 가까웠던 지난 낙스 레이드 이후, 맥스나에 대한 다각적인 연구들이 이루어졌다. 

그중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것은, 전공대원이 '8초간' 아무 능동적인 행동도 할 수 없는 그 시간을 어떻게 넘길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30프로 광폭화 이후에 탱커의 죽음은 어느 정도는 필연이라고 여겨진다. 그때까지만 첫 탱커가 버텨준다면 30프로 이후는 극한의 데미지 딜링과 벨라전에서 이미 연습된 차례대로 전사를 먹이로 던져주기 (... -_) 전술로 맥스나 킬까지는 갈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문제는 그 이전에 주기적으로 오는 8초의 행동불능 상태였다. 

여기에 대해 여러가지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중 널리 알려진 것이 힐러 클래스의 죽음 -> 부활에 의한 꼼수 아닌 꼼수다. 

지난 회에 말했다시피 8초간의 '행동불능 상태'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죽은 자'와 '고치에 갇힌 자' 뿐이다. 고치에 갇힌 채 아직 풀려나지 못한 자는 거미줄에 걸리지는 않지만, 사실상 8초간 아무런 힐도 받지 못하고 구출도 되지 못한 채 남아있다면 거의 죽음은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8초간의 거미줄 뿌리기로부터 자유로운 자는 오직 죽은 자 뿐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맥스나 공략 중인 공대에서 많이 쓰이는 '팁'이 바로  광폭화 이후 거미줄뿌리기가 시전되기 전에 힐러 한 명이 미리 죽어 있다가 영혼석 등으로 부활하여 (얼라이언스는 성기사의 중재를 이용하기도 한다) 위기일발의 순간에 탱커의 목숨을 연장시키고, 그 방패로 버티는 동안에 맥스나 킬을 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위의 방식은 잘 맞아 떨어진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광폭화 이후 탱커를 '한 턴만 더' 살리는 비상카드 같은 것이지, 안정적인 전술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월요일 레이드 초반부, 맥스나에 몇번 들이대본 상태에서 우리들의 문제점은 광폭화 까지 가는 것이 아니라 광폭화 이전의 거미줄 뿌리기 단계에서 메인탱커가 자꾸 눕는다는데 있었다. 

대체 이유가 뭘까? 그 문제로 고민을 할 때 탁월한 전략가인 전사C가 상당히 특이하고도 어려운 -_-;;; 의견을 냈다.

전사 C: 고치에 걸린 힐러는 거미줄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이용할 방법이 없을까요? 그러니까, 고치의 피를 거의 다 깎은 상태에서 완전히 깨버리지는 않고 도트 데미지로 거미줄 중에 고치가 깨어져 그 힐러만 나오게 할 수 있는 방식으로요. 그러면 그 힐러는 거미줄 뿌리기 시전시간 동안 탱커에게 힐을 줄 수 있을 텐데.

힐러들: -o-;;

고치 구출조들: -_-;;

분명히 그렇게만 된다면 매우 좋은 방법일 수 있지만, 문제는 고치가 되는 것이 힐러일지 누구일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고치에 걸린 힐러를 '거미줄 뿌리기 직후 도트 데미지로 인해 고치가 파괴되어 나오게끔 타이밍을 정확히 맞출 수 있는' 감각이라면 -_-;;;; 음..... 아무래도 맥스나 그냥 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ㅁ-;;; 전사 C는 특이하고 획기적인 발상을 잘 하는 편인데 (나이에 안 맞게) 가끔 그 특이함이 너무 지나치다! 게다가 요구하는 난이도가 너무 높다 -ㅁ-;; (같이 오닉 막공 갔다가 '오닉 2차 시 오닉시아의 머리와 90도 방향을 유지하세요'라는 지시를 듣고 거품 무는 줄 알았다. 내가 각도기 들고 게임 하는 줄 아시오!!! ㅠㅠ)

다들 난색을 표명했지만 전사 C는 그 발상에서 미련을 쉽게 못버렸는데,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전사 C: 제 생각엔 블리자드가, 8초 동안 메인탱커가 넋놓고 맞기만 하면서 버티라고 몹을 디자인하지는 않았을 것 같거든요. 분명히 뭔가 해결법이 있을 텐데요.

전사 C의 의도와는 달랐겠지만, 그 말은 내게 뭔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맥스나에 도전할 당시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가물거리는 생각에 지나지 않았지만, 거듭해서 맥스나를 경험하면서 그 생각은 점점 굳어졌다. 이제 어느 정도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다.

전사 C의 발언에서 힌트를 얻어 그와 정반대로, 나는 블리자드가, 8초 동안 메인탱커가 넋놓고 맞으면서 '버티도록' 맥스나를 디자인했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거미줄 뿌리기 8초간 맥스나의 데미지를 힐 받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전사의 방어도는, 낙스 공략이 가능한 '탱커의 방어력' 수치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수치는 또한 곧바로 낙스의 진정한 수문장이라고 일컬어지는 패치워크의 탱커에게 요구되는 수치와 연결된다. 조금 비약일 수도 있지만, 나는 블리자드가 '맥스나의 데미지를 힐 없이 8초간 버틸 수 있는 탱커라면' '패치워크의 공격 또한 감당할 수 있다'는 밸런스의 수수께끼를 거미지구의 윙보스에게 숨겨두었다고 생각한다.


뭐, 사실 블리자드가 실제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고, 답이라는 것이 꼭 하나만 있으란 법도 없다. 어쨌거나 격주만에 찾아온 본격적인 맥스나 재도전시기에 메인탱커는 방어도를 최고로 올릴 준비를 했다. 아눕이나 펠리나보다 훨씬 적응이 어려웠던 공대원들은 위에서 말한 부활을 이용한 탱커 살리기 방법을 도입해보자는 의견을 냈다. 그리고 그 역할로 가장 적임자라 추천된 것은 (-ㅠ-) 나였다! 사유인즉, '힐은 못하지만 안하지만 전멸 시 중재는 번개처럼 하는 상황판단의 달인이자 궁극의 바퀴 생존형 성기사' 이기 때문이란다 -ㅠ- 억울했다! 그러나 부정은 할 수 없었다. ㅠㅠ 사실 난 중재할때가 힐할때보다 더 재밌다. ㅠㅠ 

그러나 공략 당일, 메인탱커는 좀처럼 중재 담당 ㅠㅠ을 정해주지 않았다. 이유인즉 그 방법이 효과를 보려면 우선은 30프로 광폭화시기까지 메인탱커가 무사해야 하고, 그런 상황에서 광폭시 탱커 한 턴 더 살리기를 위해 써보아야할 꼼수지 광폭이 되기전부터 계속 중재 부활 힐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탱커의 기본방어도와 힐러들의 적절한 도트힐, 독해제를 믿고 우선은 30프로까지 메인탱커 살리기 연습을 해보기로 했다.

실패하고,
실패하고,
또 실패했다.

방어도에 신경을 많이 썼기 때문에 첫 도전때보다는 훨씬 잘 버티는 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독해제가 한 타임 늦어서, 거미줄 뿌리기 직전에 풀HP를 만들어주지 못해서 크리티컬 히트가 너무 많이 터져서 등등등등의 이유로 메인탱커가 자꾸 30프로 광폭화 전에 눕고 말았다. 오히려 메인을 눕히고 난 다음 비상 투입된 서브, 서드탱커가 더 오래 버티기도 했다. 메인 눕힌 죄책감으로 독해제와 힐이 잘 들어간 건지 -_-;;;

그렇게 몇번을 실패하고 또 실패하면서, 좀처럼 맥스나에 대한 감을 잡지 못하고 다들 힘이 빠져갔다. 그리고 그날 레이드의 마지막 도전이 시작되었다. 마음으로는 이미 다음 레이드를 기약하면서, 어떻게든 탱커를 30프로 전까지 살려보기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아, 그러나 마지막 도전에도 메인탱커가 두번째인가 세번째의 거미줄에서 독해제가 늦어 눕고 말았다. 

틀렸구나. 

다음 탱커가 재빨리 맥스나의 머리를 돌려 메인의 자리에 서서 전투는 계속 이어졌지만, 메인이 눕는 순간 이미 많은 사람들의 머리속에 저 말이 떠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의 마지막 도전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아무도 손을 늦추지 않은 채로, 계속해서 힐하고, 뎀딜하고, 공략을 진행해갔다. 죽었기 때문에 더 타자를 치고 상황을 볼 여유가 생긴 메인탱커가 계속해서 공대창으로 다음 스탭을 지시했다.

정신없이 새로운 탱커를 힐 하던 와중에 나는 고추 고치에 걸렸고, 고치 파괴가 늦는 바람에 죽고 말았다. 이젠 나도 유령 상태로 이 전투의 마지막을 지켜보아야할 때였다.


... 그런데, 느낌이 이상했다.

메인이 눕고 난 후로 어그로를 인계 받은 탱커가 꽤나 오래 버티고 있었다. HP 상태도 상당히 안정적이었고, 독해제도 잘 되었다. 새끼 거미의 소환 때 광역 처리도 엄청나게 빨랐다. 나는 누웠지만, 그외 고치에 걸린 공대원들의 구출 상태도 양호했다. 공대창을 보니 뜻밖에도 사상자가 많지 않았다. 

어, 어. 하는 사이에 맥스나의 체력이 30프로 가까이 도달했다. 메인탱커가 다급히 지시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전사E: 전사F님! 방패의 벽 돌리세요.
전사E: 소멸
전사E: 도적님들 소멸! 소멸!

도적클래스장: 소멸!! 도적들 일제히소멸 ㄱㄱㄱ!!!
도적클래스장: 소멸!! 도적들 일제히소멸 ㄱㄱㄱ!!!
도적클래스장: 소멸!! 도적들 일제히소멸 ㄱㄱㄱ!!! <--- 매크로다.

맥스나의 광폭화가 시작되었다. 전사F가 한 번을 버티고, 누웠다. 도적들의 적절한 소멸로 다음 어그로는 전사 C에게로 넘어갔다. 사실상 그가 마지막 탱커나 다름이 없었다. 맥스나를 잠시라도 버틸만한 장비, 경험, 그리고 막 소멸을 시행한 도적과 그외 딜러, 힐러보다 확고한 어그로 우위를 확보하고 있을 만한 전사는 그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죽어 누운 채로 전사 C의 체력바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와우에서 죽은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메뉴창은, 부활을 받기 전에는 '무덤으로 가시겠습니까?' 뿐이지만, 내 메뉴창에는 하나가 더 있었다.

전멸 후 부활과 재정비를 위해 흑마법사들이 습관적으로 성기사에게 걸어주는 영혼석. 영혼석 사용을 누르면, 나는 지금 바로 부활할 수 있다. 그 순간, 나는 공식적으로는 지시 받은 바가 없지만 많은 공대들이 사용했다는 힐러 부활 후 힐 꼼수(...) 사용에 최적의 상황이 왔다는 사실을 깨달 -_-;; 았다. 

성기사에게 걸리는 영혼석은 사실 일반적으로는 부활용이다. 일어나서 다시 싸우라는 것이 아니라, 혹시 실수로 전멸하게 되면 멀리 다시 뛰어오느라고 시간을 지체하지 않도록 안전한 근처에서 누워 부활 릴레이를 시작하라는 의미에서 걸어주는 영혼석이다.  '실수로 내가 눕긴 했지만 전멸은 안하겠네. 일어나서 내가 힐 한 번 더 해주면 쉽게 잡겠지' 라고 잘못된 상황 판단을 할 경우, 전 공대원이 무덤부터 공략지까지 다시 뛰어오는 수고를 해야 하기 때문에 전투 중 영혼석 사용은 힐러로서는 상당히 신중하게 판단해야할 부분이다. 

그러나, 나에게 지금은 최적의 상황이었다. 이것은 공격대의 오늘 일정 마지막 도전이다. 즉, 재시도가 없으므로 재정비 시간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 잘하면 대박이고 ( --) 망해봤자 본전이다 (...) 유일하게 걱정이 되는 것은 제때 일어나서 제때 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뿐이었다. -_- 늙으면 손이 떨려서 말이지.


초조하게, 전사 C의 체력창과 마지막 남은 광폭 상태의 거미줄 뿌리기 시간을 알리는 타이머바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글은 길지만, 시간은 짧았다. 그 짧은 시간동안 저런 생각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다음의 이야기는, 아래 영상이 말해줄 것이다. (...) 

사실 이 영상은 두 번의 맥스나전을 편집한 것이다. 앞의 것은 실패했고, 뒤의 것은 비슷한 상황에서 내게 영석이 걸려 있었고, 성공했다. 대신 성공한 날의 앞부분 영상은 촬영을 못했기에, 맥스나전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다 담기 위해서 두번의 공략을 합쳐보았다. 특히 앞부분 내가 고추 고치에 걸려 처절하게 죽어가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인 하드고어 필름이라고 자부하는 바이다. 고치에 걸리면 저렇게 죽는줄 당해보고서야 알고 화면 보며 얼마나 웃었던지. 블리자드 변태들.

우리는 이렇게 처음으로 맥스나를 잡았다. 그날 저 짓 (...) 을 한 뒤 한동안 무지 기분이 좋았다. 힐 안한다고 구박받던 설움이 (... 누가 구박했더라) 단숨에 날아간 기분이었다. 거미줄 뿌리기 막판에 갑자기 전사 C의 피가 확 차버리는 것을 보고 의아해하면서도 정신이 없어서 어찌 된 영문인지를 몰랐던 공대원들은 나중에 진상을 듣고서 

"역시 그런 얍삽한 건 에뎅님이 최고라니깐"

...라고 평했는데 이거 기분 좋아해야 하는건가 말아야하는건가 -_-a

... 아니, 생각해보니, 결국 형태는 다르지만 공대 초창기에 하던 부활조 노릇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드는걸. 

... 젠.장.

그것이 불과 얼마 전의 일인것 같은데, 이제는 맥스나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는 우리들을 발견한다. 그 첫 킬 이후로 위의 꼼수는 쓰고 있지 않다. 사실, 저걸 꼼수라고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의견은 갈라진다. 버그 플레이도 아니고, 분명히 특정 클래스에 주어진 기능을 최대한 이용해 아군의 불리한 지점을 커버하는 전술이니까. 다만, 어딘가 정면으로 돌파한다는 느낌보다는 우회한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기질상 꼼수에 능하긴 하지만 (.. 크흑. 인정해야 한다니 분하다) 또한 기질상 나는 정면 돌파를 좋아하기도 한다. 그뒤 맥스나전에 임할때마다 공대원들은 '정통파 부활조 꼼수 영석'(...) 을 기대하는 눈치였지만 묘하게도 메인탱커는 그 방법을 구체적으로 지시하지 않고 (그런 쫀쫀하고 비열한 계책은 차마 지시할 수 없으니 알아서 하라는 뜻인가...? -_-;;;) 탱커의 방어도와 힐러의 힐로 밀고나가는 방법만을 더욱 다듬어갔다. 다시 한 번 저 부활조(...)의 쾌감을 느껴보고 싶은 맘이 없는 건 아니지만, 더디 가더라도 그런 방식이 공대의 기본기를 튼튼하게 만드는 길이라는데는 나도 동의한다. 게다가 (...) 슬그머니 '혹시 누우면 꼭 일어나서 탱커 힐 주세요' 라고 귓말 주면서 흑마법사가 몰래 영석을 걸어줘도 그뒤로는 이상하게 맥스나전에서 잘 죽지를 않아 저렇게 해볼 기회가 없다 -_-a 

결국 오래 걸리더라도, 착실한 기본속에서 해법은 발견되는 모양이다. 전사 E가 어느날, '이제 맥스나전의 비밀을 다 풀었다'고 말했다. '그게 뭔가요?' 라고 물었더니 뜬금없는 소리를 한다. 

"33프로에서 공격을 중지하는 거에요. "

그러고보니 그날, 맥스나를 쉽게 잡을 때 메인탱커가 33프로 시점에서 갑자기 공격 중지 지시를 몇줄 도배한 기억이 떠올랐다. 무슨 의민지 모르지만 일단 말은 듣고 봐야 해서 다들 공격을 중지하고 도적들은 소멸을 했다. 그 33프로의 의미가 대체 뭐였을까? 반문하려다가, 답이 떠올랐다.

"아. 광폭화 상태가 되기 전에 한 번 거미줄 뿌리기를 지나쳐보내고, 그 직후 다음 거미줄 텀까지 최대한 힐과 딜을 하면 탱커를 많이 희생시키지 않고 한두명 안에서 맥스나 킬을 할 수 있다는 거군요."

"네. ^^"


몸으로 겪으면서, 우리는 조금씩 튼튼해지고, 현명해진다. 그것이 지금 켈투를 잡은 공격대가 얻은 경험보다는 적겠지만, 어제의 우리보다는 훨씬 나아진 것이다. 조금 더 단련이 된다면, 탱커를 아무도 희생시키지 않은 채 맥스나를 눕힐 수 있는 날도 올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아직 가야할 길이 많다.
그리고 그 길에는 많은 숨겨진 이야기와, 사건들이 있다.

그중에, 맥스나 킬을 전후해서 일어났던 어떤 작은 사건을 
나는 지금, 이야기해도 좋을지 안하는게 좋을지 여전히 망설이고 있다.
어떻게 해야할까.

공격대 이야기 [Naxx] - 9 : 울온의 아이, 마비노기의 아이

공대 내부에서도, 혹은 이 글을 보는 분들한테서도 종종 듣는 이야기다. 전사나 공대장 이야기 말고 공격대의 다른 사람들 이야기도 좀 써주시면 안될까요?

물론 나도 그러고 싶다. 공격대에는 최소한 8클래스, 40명 이상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왜 나는 늘 전사나 공대장 이야기를 주로 쓰게 될까? 그야 물론 내 주된 관심사가 그쪽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누군가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사람의 공과를 다 드러내는 행위가 되기 쉽다. 설령 내놓고 결점을 지적하지 않더라도 현재 '알고 지내는' 사람에 대해 뭔가를 쓰기는 참 쉽지 않다. 나는 그 사람을 잘못볼 수도 있고, 내 시각이 편협할 수도 있고, 또 욕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모든 걸 좋게만 쓴다면 아무 의미도 없지 않은가? 그러다보니 큰 맥락 이외의 개인사는 자꾸 피하게 되고, 공대장이나 메인탱커의 이야기는 공격대 이야기의 메인스트림 (...) 이기 때문에 설령 개인사가 좀 드러난다고 하더라도 참아주리라고 믿으면서 지를 수 있다 -_-a 고나 할까.

뭐, 이렇게 변명해봤자 결국 '나한테 관심이 없어서 안써주는 거잖아요!' 라는 앙탈을 당할게 뻔하다 -_-;;; 뭐, 그리고 이제는 어차피 점점 막바지로 가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 해서, 좋다, 원한다면 써주마, 그렇지만 후회는 하지 마라 - 라고 으름짱을 놓으며 공대장도 메인탱커도 아닌 공대원들 이야기를 한 번 써볼까 한다! (...)

이야기는 지금까지의 흐름대로, 낙스라마스의 공략 진도에 맞춰보기로 하겠다. 맥스나를 잡아 거미지구를 클리어한 우리 공대가 다음 목표로 잡은 것은 기사단 지구의 첫 네임드인 훈련교관 라주비어스이다. 이쯤 되면 낙스를 아는 분들은 누구를 소개하게 될지 눈치챌 것이다. 라주비어스 공략의 꽃인 사제(!) 들이다.

훈련 교관 라주비어스는 네 명의 수습생들을 닥달하며 기사단 지구의 훈련소 안을 어슬렁거리고 있다. 이놈은 몹시도 데미지가 무식해서 낙스 공략 초기의 공격대 탱커로는 도저히 감당이 불가능한 한 방을 구사한다. 플레이어 캐릭터로는 탱킹이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매우 색다른 공략방법을 쓴다. 즉, 라주비어스 주변의 수습생들을 사제의 정신지배 마법으로 지배하여 한 놈씩 돌아가면서 '탱킹'시킨다. 전사들은 다음 차례로 정신지배할 수습생들을 한쪽 구석에서 탱킹하다가 정신지배 담당 사제(이하 정배사제)가 마법을 쓸 준비가 되면 한놈씩 보내서 정배를 시키고, 사제는 정배된 몹을 라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몸빵을 시키고, 그 사이에 미친 듯이 뎀딜을 해서 잡아야 하는 것이 라주비어스 공략의 핵심이다.

가만 살펴보면 낙스라마스는 힐러들에게 무척 다양한 역할을 요구하는 인던이다. 지금까지 레이드 인던에서 힐러의 역할은 퓨어클래스 하이브리드를 가리지 않고 '닥치고 힐' 일변이었는데 무려 '정신지배 탱킹'의 역할을 요구하다니! 그런데 정신지배 마법의 사용을 필요로한 네임드전을 우리는 이미 라주비어스 이전, 펠리나에서 경험했다. 차이가 있다면 펠리나의 정배 사제는 한 명이지만, 라주비어스에서는 쉬는 틈 없이 정배 탱킹이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두명이 하게 된다는 것이다.
라주비어스에서 정배 사제 역할을 맡은 두 명을 볼때마다 나는 속으로 웃음이 난다. 게임 경력면에서나, 성격면에서나, 어쩌면 저리도 대조적인 사람들일까, 하고 말이다.

둘 중 한 사람을 먼저 소개하자. 이 사람의 약자는 사제 A-1으로 해야겠다. 사제 A-1은 현재 사제 반장이다. 안퀴라스 공략 후반부쯤에 공대에 합류한 사람이다. 개인적인 친분은 전혀 없다.

그런데, 왜 그런 경우가 있지 않은가? 친분은 없고, 친해질 끈끈한 기미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믿음이 가는 사람. 이 사제 A-1이 그런 경우인데, 그 이유가 뭘까 곰곰 생각해보니 그의 캐릭 네임에서부터 막연히 느낀 동질감 때문인 모양이다. 그 동질감이란 '나와 저 사람은 게임의 뿌리가 같다'라는 것이다.

MMORPG를 한 사람들 사이에는 그런 식의 소통이 존재한다. 와우를 하다가, 인던 플레이에서 조금 말이 통하기 시작하면 서로 게임한 경력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그러다가 상대가 '전 리니지를 하다 왔어요' 라고 했을 때, 혹은 상대가 '전 에버퀘스트를 하다 왔어요' 라고 할때, '앗 나도 그거 했는데' 라면서 반짝반짝 +_+ 눈이 마주치는 그런 것. 일종의 '모교' 같은 느낌이랄까.

내 경우에는 그것이 울티마 온라인이다. 사제 A-1의 캐릭 네임은 울온을 아는 사람이라면 (아니, 정확히는 울티마 시리즈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아볼 그런 이름이고, 때문에 지금껏 'A-1님. 울온 하다 오셨죠?' 하고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는데도 막연히 나는 그가 울온을 했었을 거라고 믿고 있다. -_-;;

막연하긴 하지만, 나는 '리니지를 하다 왔어요' 와 '에버퀘스트를 하다 왔어요', '울티마 온라인을 하다 왔어요'는 각각 다른 선입견을 심어준다. 누군가 리니지를 하다 왔다고 하면, 나는 그 사람이 몹시 끈질기고, 몰입을 잘하고, 호승심이 강할 거라는 선입견을 갖는다. 에버퀘스트를 하다 왔다고 하면, 나는 그 사람이 좀 더 클래스 역할이나 공식, 밸런스에 집착하고, 직업별 최적 동선이나 트리에 관심이 많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는다. 그리고, 마음의 고향(묵념)인 울티마 온라인을 하다 온 사람을 만나면, 나는 이유도 근거도 없이, 그 사람이 나와 같은 경험을, 또 하나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체험하고, 그 세계가 흥성했다가 몰락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때로는 게임이라는 것을 떠나기도 했다가, 또 다른 게임 속을 방황하기도 했다가, 밸런스와 공식에 집착도 해보고, 아이템에 집착도 해보고, 그것들을 또 다 버려보기도 하고, 그런 끝에 와우로 들어와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이 같은 그런 게이머일 거라고 -_-;;;; .... 그냥 쉽게 말해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어봐서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고 두드려도 깨지지 않는 그런 게이머일 것이라고 막연히 믿고 있다. ^^;;

같은 공대 생활을 해본 것은 오래 되지 않았지만 사제 A-1에 대한 막연한 믿음은 아마 거기서 출발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단지 그것만 있는 건 아니다. 사제 A-1을 처음 만난 것은 잠깐 활동했던 20인 공격대에서였는데, 거기서 캐스팅 타임이 긴 상급치유나 부활 마법을 외울 때 사제 A-1의 매크로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사제 A-1: 자. XX님. 잠깐 한숨 돌리는 시간 동안 암산해봅시다. 21683782749 곱하기 56934934254은 무엇일까요? 

... 저 매크로를 처음 본 사람들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계산기 돌리러 가는 바람에 사상자가 발생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혹은, 사상자가 발생했을 때 사제 A-1의 저 매크로가 좋은 핑계가 되어주곤 했다)

게다가 한참 공략중에 이따금 전사와 도적들 틈에 끼어서 몹에 달라붙어 지팡이질 (...)을 하고 있는 모습도 종종 목격되고 있다. -_-;; 줄구룹에서 가즈란카가 주는 내트 페이글의 지팡이라나 뭐라나. 

사제 A-1의 엽기행각(...)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사제의 특성 트리 중에 마법을 받은 대상자의 마법 효과를 15초간 증폭 시켜주는 마력 주입이라는 특성을 찍은 사제 A-1은 레이드 중에 꼬박꼬박 마법사나 흑마법사에게 마력을 주입하는데, 그때의 매크로는 "자 XX님! 15초간 어글 팍팍 드세요!" 이다. 캐스터 공대원들은 이 대상으로 찍히는 것을 일명 "A-1님의 데스노트"라고 부른다. 광역마법 타임, 행여 잔달라나 단명의 마력 부적을 발동시킨 상태일 때, 혹은 몹에 일몰 효과가 발동되었을 때, 기회를 놓치지 않고 평소 눈여겨 봐두었던 (...) 캐스터를 향해 데스노트를 날리면, 해당 캐스터는 극심한 데미지를 몹에게 선사하고, 그 댓가로 어그로를 잔뜩 먹고, 난타당해 바로 저승행 특급열차를 탄다. -_-;; 힐은 안해도 마력 주입은 절대로 빼먹지 않는 것이 사제 A-1의 행동방식이다.

이쯤 되니 공대원들은 내 파티가 되는 것 이상으로  사제 A-1의 파티가 되었을 때 수리비 걱정을 하곤 한다. 물론 여기에는 많은 설 (-_)이 있다. 그래도 사제 A-1이 나보다는 낫다거나. -_-;; 둘 다 비슷하다거나 -_-;;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제 A-1의 엽기행각이 나보다 더하다고 주장하고 싶다. 왜냐하면...

극히 드물게도 (정말 드문 경우다) 사제 A-1가 내가 같은 파티의 힐러가 된 일이 안퀴라스에서 딱 한 번인가 있었다. 그때 같은 파티의 법사와 전사는 절망하여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

다른 파 전사: 2파에 힐러가 없어요. (전사 C로 기억한다 -_-+)

같은 파 법사: 힐러는 없고 전사가 셋이네. 

다른 파 전사: 사제도 있고 기사도 있잖아요.

같은 파 법사: 사제는 지팡이 전사고, 기사는 설퍼 전사잖아요. 힐 안해요 둘 다. 

그런 상황에서, 서로 힐 안하는 고수 (... -_)의 명성을 누리던 두 사람이 마주한 파티창에는 이런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사제 A-1: 오늘은 힐 안해도 되겠네요 +_+
나 : ... 왜요? (속으로: 평소엔 한 것처럼 그러시네 -ㅁ-)
사제 A-1: 에뎅님이 있잖아요.
나: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데요?
사제 A-1: 그냥 암. 

보라! 최소한 내가 사제 A-1보다는 힐 많이 한다!  사제 A-1도 인정했다! (.... 텨텨)

어쨌거나 이런 막연한 믿음 -_-;;과 평소의 품행 때문인지, 전사 E가 처음 낙스라마스에서 펠리나 정배 사제를 누가 하는 것이 좋겠느냐고 물어왔을 때, 나는 주저없이 사제 A-1을 추천했다. 닥힐 형의 섬세한 힐러 기질이 아니고 엽기적인 연구가이자 유유자적한 게임 타입 때문에 사제로서 특이한 역할을 맡아도 위축되지 않고 잘할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마법 적중 장비나 특성 같은 것은 고려하지 않았다. 그 차이를 뛰어넘을 만한 배짱이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다른 섬세하고 여린 사제들은 만약 정배가 잘 안되서 공대를 수차례 전멸시킬 경우 자책을 하거나 기가 죽을 위험이 있지만 사제 A-1은 설령 지금까지 힐 안한게 대담한 품성 때문이 아니라 수전증 때문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한이 있더라도 -_-;; 그깟 (...) 일에 좌절하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무책임한 이유로 사제 A-1을 추천했다고 나를 비난하지 말라. 나만 추천한게 아니었다. -_-;;; 그래서 사제 A-1은 펠리나의 정배 사제를 맡아 예상한 대로 대범하게 -ㅁ- 그 역할을 잘 해냈다.라주비어스에서도 두 명의 정배 사제 중 하나를 A-1이 맡게 된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나머지 한 명은? 

신기하게도 우리 사제진의 대다수가 여성들이다. 혹은 여성이 아니더라도 매우 여성적인 플레이를 구사한다. 때문에 어떤 부분에서는 강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약하다. 이를 테면 무슨 일이 있어도 탱커를 살려야 하는 네임드에서는 이런 여성적인 힐러의 기질이 의외의 파워를 발휘한다. 정말로 모성애라고 밖에는 볼 수 없을 정도의 처절한 힐이 퍼부어진다. 하지만 남성적 기질이 필요한 부분에서는 이것이 약점이 될 수도 있다. 사제 A-1의 존재는 그런 면에서 여태까지의 공대 사제 기풍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어준 셈이다.

그런데 나머지 한 명은 어떻게 하나? 사실 나는 여기서 사제 C-1을 추천했다. 이런 역할에는 장비보다 중요한 것이 기질이라고 생각하고 사제 C-1은 기질상 가장 A-1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제진의 의논으로 결정된 것은 정신지배 마법에 유리한 적중 장비를 가장 많이 맞춘 사제 G였다.

사제 G는, 공대장이나 메인탱커 이야기가 아닌 다른 이야기를 하겠다는 서두를 무색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즉, 사제 G가 바로 현재의 공대장 -_-;; 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공대장으로서의 G가 아니라 사제로서의 G만 이야기해보겠다. 사제 G는 앞에도 말했다시피 여러 가지 면에서 사제 A-1과는 대조적이다. 

일단, 사제 G는 게임 경력이 짧다. 울티마 온라인이나 에버퀘스트 정도가 아니라, 첫 MMORPG이자 와우 외에 유일하게 오래 해본 온라인 게임이 (.. 뭐 그뒤로 여러가지 잡다하게 해본 것 같긴 하지만 ) 마비노기(..)다. 그리고 그 마비노기에서는 <이런 짓>도 했던 녀석이다. (<--- 공대장의 비리 폭로 그 첫번째 시리즈! XX 소녀의 기원을 알고 싶은 사람은 조금 알아보기 힘들겠지만 링크된 게시물을 꼼꼼하게 읽어보시오) 저런 녀석이 와우처럼 캐릭터 안 이쁜 -_-;;; 게임을 시작하게 된 것은 순전히 내가 공대 동영상들을 보여주면서 와우에 대한 환상을 잔뜩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 

물론 공대장이라는 책임 때문이겠지만 사제 G는 낙스를 준비하면서 사제에게 요구되는 적중 아이템을 맞추기 위해 포인트 나락도 감수하고 온갖 버려지는 템들을 주워 모았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나락의 군주다. -_-;; (현재 공대 포인트 꼴지)  전임 공대장인 나는 포인트 깡패라고 불렸던 것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 

그렇지만 내가 사제 G를 추천하지 않았던 것은, 적중이 높고, 성실하지만, 그만큼이나 자신이 실수했을 때 자책또한 심한 타입이기 때문이다. 실수했을 때 더 중요한 것은 자책이 아니라 교정인데, 워낙 모범생처럼 성실하고 또 그만큼 이것저것 잘하는 녀석이다보니 못해냈을 때의 자신에 대한 탄식이 좀 크다. 나는 딴 사람이 탄식하는 걸 보는 것이 딱 질색인지라 실패해도 탄식하지 않을 사람을 고르는 취향인 것이다. 

하지만 결국 결정은 사제 G로 났고, 곰곰 돌이켜보면 내 취향과 달리 결정된 것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분명히 사제 G는 돌발 상황에서 당황하기도 하고, 삽질도 하지만 역할을 수행하면서 조금씩 성취감도 느낄 것이다. 그 성취감은 언제 시작될지 모를 낙스전을 대비해서 몇달이나 폐허와 줄구룹을 다니면서, 포인트를 쏟아부어 버려지는 아이템을 모으면서 적중을 맞추고 준비한 시간 만큼 쌓인 것들에 대한 보답이기도 할 것이다. 조금 돌아가더라도, 그런 성취감을 느끼는 것도 역시 게임에서는 중요한 것이겠지.

이렇게, 대조적인 두 명의 사제를 공략의 기둥으로 삼아 우리는 라주비어스에 도전했다. 묘하게도 남들은 쉽게 잡는다는 그 라주비어스에서 시간을 꽤 지체했던 것 같다. 계산상으로는 그날 라주비어스 공략이 2시간 내에 끝났어야 하는데 계속 사소한 사고들이 발생하면서 레이드 마지막 시간까지 갔다. 마지막 트라이 때. 몇번이나 자신의 실책을 공대창에 사과하는 사제 G가 느끼고 있을 부담이 전해져왔다. 그래서 한 마디 해줬다. 몇달이나 폐허, 줄구룹 다니면서 아이템 맞춰온 시간이 억울하지 않느냐고. 이번에는 잘 집중해서 잡아보자고.

그 도전에서, 우리는 라주비어스를 잡았다. 낙스라마스 진입 3주차. 이제 4킬. 

울티마 온라인에서 태어난 오랜 게이머와, 마비노기에서 태어난 어린 게이머가, 와우의 공격대 안에서 함께 라주비어스 공략의 정배 사제로 활동하는 현장이다.

공격대 이야기 [Naxx] - 10 : 신뢰의 실체

즐거운 공략 이야기를 하나 썼으니 골치아픈 공격대 뒷이야기를 또 하나. 지난 8회 말미에서 어떤 이야기를 해야할까 말아야할까 망설이고 있다고 말했는데, 일주일 동안 곰곰 생각을 해본 끝에, 이야기를 하기로 결정했다. 처음 밝힌 바대로 봐줄 생각은 없고 ^^;; 예외 역시 없기 때문이다.

어거지로 맥스나를 첫 킬 하기 직전 , 그러니까 막 낙스 진입 첫 주기를 순조롭게 마치고 난 다음 주에 우리 공대는 내부적인 진통을 겪어야 했다. 그 진통 중 어떤 부분은 모두에게 드러난 상처이고, 어떤 부분은 극히 몇몇 사람들만이 아는 상처다. 그리고 나는 그 상처들 중 어떤 부분은 현재 진행형이며, 어떤 것은 아마도 영원히 낫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시효가 끝난 과거를 이리저리 미화해서 쓰는 것은 쉽지만, 아직 유통중인 현재의 고민과 상처, 속사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일은 어렵고도 무겁다. 거기에는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저간의 이야기들을 하는 것이 옳을까, 아니면 입을 다무는 것이 나을까 고민을 하다가, 그저 글 나가는 대로 솔직하게 다 쓰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비록 그 고민들이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 것이라고 해도, 고민의 뿌리가 건강하고, 각자의 근거와 타당성이 있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정당하지 못한 이야기라면 숨겨야겠지만, 정당한 이야기라면 왜 말하는 것을 두려워해야겠는가.

사설은 길지만, 사실 본론은 간단한 이야기다. 파밍 인던인 검은 날개 둥지를 격주로 가는 것으로, 즉 낙스에서의 새로운 네임드 도전 가능한 시간을 격주에 한 번 확보하는 것으로 일정을 잡고, 낙스 첫 주를 보낸 공대 운영진은 그 다음주, 곧바로 새로운 일정 변경을 제안했다. 즉 공대의 일정을 추가로 늘리던가, 아니면 검은날개 둥지를 완전히 포기해서 주에 최소 2일은 낙스 도전을 할 수 있게끔 하자는 것이다. 당연히 낙스 진도가 나갈 수록 언젠가는 오게 될 제안이었으나, 그 시기가 낙스 진입 첫주만에 왔다는 것이 문제였다. 공대 내부에서 반발이 만만치 않게 나왔다. 불과 그 전전주에 총회를 통해 격주안이 결정이 된 상태에서 한달도 지나기 전에 변경 이야기가 나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런데, 만약 반발이 단지 '너무 성급하다'라는 이유에서만 나온 것이라면 사실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성급해도 옳은 결정이라면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사실은, 이 '성급함'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저마다 달랐다는 것이 더 중요한 원인이 아니었을까? 사실 나는 이때의 충돌이 공대안에 존재하는 각각 다른 세대의 이해와 요구가 공대장을 매개로 충돌한 것이라고 본다.

그 세대는, 이렇게 나눠볼 수 있다. 첫째. 이제 막 공대에 들어와 검은 날개 둥지의 파밍이 중요한 새세대들이다. 둘째, 검은날개 둥지 공략시기, 혹은 안퀴라스 사원 공략시기에 들어와 화산심장부부터 둥지까지 모든 강제입찰 아이템들을 다 먹어서 포인트는 나락이라 앞세대에게는 포인트에 밀리고, 화심 포기 후에 들어와 강입을 상대적으로 덜 당한 새세대에게는 맹렬하게 추격을 당하고 있는 중간세대. 셋째. 공대 초창기부터 활동해와서 화심도 둥지도 거의 의미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관심은 오직 새로운 공략 인던 뿐이며 개인별 선택지는 공격대의 일정을 늘릴 것이냐, 아니면 관심없는 인던을 포기할 것이냐에 국한된 구세대.

구세대는 일정을 늘리거나 검둥이든 사원을 포기해서라도 낙스 공략일이 늘어나기를 원한다. (피로도라든가 일상생활 문제 때문에 일정을 늘리는 것보다는 포기하는 쪽에 아무래도 더 지지자가 많다) 새세대는 낙스 공략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갖춰야할 중요한 아이템들의 보급창인 검은날개둥지를 공대가 아무런 대책 없이 포기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낀세대는 여러가지 면에서 애매하다. 어떤 부분은 구세대와 동감하고, 어떤 부분은 새세대와 동감한다. 하지만 계속해서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은 상대적인 박탈감이다. 그것을 드러내놓고 주장하면 오직 포인트와 아이템에만 관심있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기에 말조차 조심스럽다. 무엇보다도 민감한 사안이고, 해결이 가장 어려워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누구도 <낙스라마스를 위해 좀 더 시간을 할애하자>라는 대의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원하는 것, 혹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은 각자 다르다. 그런 상황에서 공대원들은 여러 가지 채널을 통해, 각자 다른 방식으로 충돌하고, 불협화음을 빚어냈다. 

누군가 말했다. "총회 결정 사항을 일주일만에 바꾼다는 것은 너무 성급한 것이 아닙니까?"
또 누군가 말했다. "둥지 격주만 해도 낙스를 위해 많이 양보한 거라고 생각하는데, 아예 둥지를 포기한다고 하면 좀 그렇네요."
또 누군가 말했다. "검은 날개 둥지에 더이상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은 쉽게 포기를 결정할 수도 있지만요..."

이해와 요구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불만의 소리들 앞에서, 공대장은 결정을 유보하고 조금 더 일정 조정에 대해 고민할 시간을 갖기로 했다. 그리고 공대가 해산한 뒤, 파티창에는 그날 같은 파티였던 나와, 공대장과, 그리고 메인탱커가 남았다. 

공식적인 채널을 통해 오간 이야기 뿐 아니라 직업 채널이나 기타 통로를 통해 접수된 공대원들의 전반적인 반대 분위기를 전해들은 메인탱커가 몹시도 냉소적으로 말했다.

"갑자기 힘이 쭉 빠지네요. 열심히 낙스 준비를 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보이기도 하고. 저, 다음 낙스 일정 때는 그냥 천천히 진행하겠습니다. 대충하면 얼마나 느리게 갈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어요. 그래도 되겠죠?" 

공대장 역시 다소 기운이 빠져 보였고, 메인탱커의 말에 그저 씁쓸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그러지 말라고 말할 수가 없는 현실이 버거워보이는 그런 웃음이었다. 메인탱커는 몇번이나 거듭 말했다. 그래도 되느냐고 확인하려는 듯이. 
가만히 보고만 있는 내게 그 말은 <확장팩 발매가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에서, 어떻게든 빨리 낙스를 정복하기 위해 포기하거나(인던을), 혹은 늘리거나 (일정을) 어떤 쪽으로도 결정하지 못한 채 이 빈약한 조건 안에서 더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나 역시 편하게 대충 할 수 있다. 그럼 다 같이 대충 해볼까? 어떤 꼴이 나는지?> 라는 원망으로 들렸다. 

그렇게 몇번을 말하다가, 메인탱커가 잠자코 있던 내게 갑자기 물었다. 
"이런 마음으로 제가 메인을 맡는 게 옳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는 물론 즉시 답했다.
"아뇨. 그런 마음으로는 메인 못하시죠. 그만 두세요. 공대원들이 지휘부를 믿지 못해도 지휘부는 공대원을 믿어야죠. 공대원 끌고 나락으로 가겠다면서 어떻게 지휘를 하겠습니까? 관두세요."
"그렇죠? 제가 생각해도 옳지 못한 거 같네요."

다음 낙스 일정 전까지 메인탱커는 마음의 결정을 하겠노라고 했고, 우리들 역시 해산했다. 불과 이삼일 남은 그 기간. 공대원들에게는 알리지 못한 그 기간 동안, 공대장과 메인탱커는 각자 복잡하고 무거운 고민을 안고 있어야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공대장은 그때 전사E의 낙스라마스 초반 지휘를 보고 내가 이전에 말했던 바대로 전적으로 맡길 만한 사람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그 시점에서 메인탱커의 교체는 원하지 않았다. 때문에 어떻게든 메인탱커의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아주려고 했고, 그 설득이 좀처럼 쉽지 않았기 때문에 괴로운 며칠을 보낸 듯 하다. 가뜩이나 힘든 상황에서 메인탱커의 질문에 내가 벌컥 '그럼 관두세요' 라고 대답하는 것까지 보았으니 (...) 오죽 심장이 떨렸을까. 나중에 들은 말로는 한편으로는' 덜컥'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그런 마음 갖지 말라고 야단 치기 위해서 전사 E를 다그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추이를 지켜보았는데, 전사 E가 쉽게 마음을 다잡기는 커녕 그 뒤로 하루, 이틀 점점 더 그만두겠다는 쪽으로 마음을 굳혀가는 듯이 보였으니 속이 타도 보통 타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또한 전사E는 내가 보건대 일종의 '신뢰의 실체'를 찾는데 실패한데서 온 고민의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등 뒤에 믿는 구석이 있어야 앞으로 나갈 수 있다. 등 뒤에 적 뿐이거나, 냉소적인 눈빛들 뿐이라고 생각하면 어떤 장수도 결전의 마음을 다질 수는 없다. 낙스 일정 조정을 둘러싸고 튀어나온 공대원들의 그 각이한 이해와 요구는 지금까지 '우리는 모두 한 공대, 동지들'이라고 두리뭉실하게 인식해온 그 막연한 동료애의 실체를 벗겨낸 것이다. 이런 해부된 실체 앞에서 가장 흔들릴 수 밖에 없는 것이 지휘자의 입장이었으리라. 이런 스타일의 힘은 어느 정도 천진하기까지 한 믿음과 충직성에서 나오는 것인데, 이런 복잡한 실체를 대면하고 난 이후에도 여전히 그런 힘을 낼 수 있을까? 당연히 흔들릴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해온 것들 때문에 쉽게 포기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이미 느끼기 시작한 회의를 무시할 만큼 자기기만에 능하지도 못하다. 만약 이 시점에서 메인탱커를 그만 둔다면 그건 그냥 지휘를 다른 사람에게 넘긴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에게는 레이드를, 그리고 와우를 떠난다는 것까지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모든 것이 의미가 없으니.

당시에 이런 극단적인 이야기가 오고가는 것을 아는 세 사람 중에, 앞서 그 이삼일간 복잡하고 무거운 고민을 안고 있었던 것은 공대장과 전사 E 두 사람 뿐이었다고 말했다. 나를 쏙 빼놓은 것은, 당연히 나는 그 문제에 관해서는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_-a (두 사람, 미안! - 도망)

뭐 어쩔 수 있겠는가. 밑천을 다 드러내는 것 같아서 좀 찜찜하긴 하지만 -_-;; 드러낸다고 이 연륜과 배짱(...)이 쉽게 흉내내지는 것은 아닐 테니 (음하하) 고백하자면.

일단 나는 전사 E가 '삐진' 상태라고 생각했다. (...) 사실 공대원들이 제기하는 문제는 다 타당성이 있다. 터무니 없는 요구가 아니다. 물론 그 방향대로만 가서는 다른 문제가 발생하고, 낙스 공략에 대해서는 해결책이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부려서는 안될 욕심을 부리거나 도의를 어기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만약 서로 조금이라도 상처가 되는 말이 오갔다면 그건 논의가 전개될 테이블이 좀 더 '그럴싸하게' 만들어지지 못한 탓이고, 충분한 대안이 제시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건 지도부가 해결해야할 일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 누구도 <낙스 공략 하지 말자>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게 중요한 거다. 낙스 공략, 하고 싶지만 이런 저런 장애가 있고 이런 저런 고민이 있다고 하소연하는 것이다. 그 장애와 고민들을 할 수 있는 한 해결할 방도를 끝까지 모색해보는 것이 지도부의 역할이고. 그 해결책이 한계가 있더라도 성의껏 제시가 된다면, 그리고 지금까지 합리적인 운영을 해온 공격대라면 합의점은 어떻게든 찾을 수 있다. '그만 두겠다느니' '이래서는 공대가 안돌아간다느니' '의미가 없다'느니 하는 극단적인 생각과 발언은 마지막까지 합의를 위해 노력해보지 않은 상태에서 자포자기하여 나올 만한 발언들일 뿐이다. 진두지휘를 해야할 전사 E 역시 바로 이 함정에 빠진 것이다. 자신과 전혀 다른 근거 위에 서있는 타인을 설득할 자신도 없고 방도도 보이지 않고 의욕도 나지 않을 때 사람은 종종 자포자기하게 된다. 이 상태를, 아주 짧고 단순하게 표현하면 '삐지는 것' 이다. 

물론 사람은 삐진 상태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걱정하지 않은 이유는 -_-;; 전사 E를 지금까지 지켜본 바, 삐진 상태로 일을 저지를 타입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막연한 믿음과는 좀 종류가 다르다.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믿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즉, 안 그럴 거라고 기대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간의 진통 후에 이 '극소수만이 알고 있던 진통'은 내 '신뢰'대로 결론지어졌다. 전사 E의 홍역은 끝났고, 여전히 낙스 지휘를 잘 하고 있다. ^_^ 사실, 사람이 개인이든 집단이든 타자를 향해 삐진다는 것은 그 타자에 대한 믿음이 이해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기대에 근거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 홍역이 전사E에게 공격대의 구성원들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기회가 되었기를 바라고 있다. 실체가 드러나는 신뢰라는 것은, 이해가 아니라 기대에 근거한 신뢰라는 것은 양쪽 모두를 상처 입히는 칼이기 때문에.

그러나, 여전히 한 가지 문제는 남았다. 낙스 공략을 위한 공대의 일정.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공대원들의 고민. 큰 시각에서 보면 메인탱커의 저 홍역은 40개의 점 중에 하나일 뿐이다. 공격대는 나머지 39개의 점이 앓고 있는 홍역 역시 해결해야만 했다.

늘어만 가는 공략 인던. 제한된 공격대 일정. 만약 모든 공격대가 세계적으로 극소수에 해당하는 일부 선발 공대들처럼 일주일에 7일, 혹은 6일을 모두 레이드에 투자할 수 있다면, 레이드 어려운게 뭐가 있겠는가? 

몹 잡는게 어렵다, 앵벌하는게 어렵다, 공대장 노릇 어렵다 어쩌구저쩌구 찔찔 짜는 소리들을 들을 때마다 속에서 불끈 치밀어오르는 말이 있다. 솔직히 세상 사는 것 중에 어렵지 않은 일이 뭐가 있나? 하지만 레이드는 게임이다. 게임이 어려워봤자지. -_-;; 오닉시아 딥 브레스에 맞아 죽는다고 내 몸에 물집 하나 생기던가? 공대장 노릇 제대로 못한다고 누가 감방에 처넣던가? 공략 중에 전멸한다고 발톱 끝이라도 아프던가? 책이라도 하나 쓸 수 있다. "레이드가 제일 쉬웠어요." 

이 쉬운 레이드를 어렵게 하는 유일한 제약 조건은 '시간'이다. 만약 세상 모든 공대가 주 7일 레이드가 가능한 집단이라고 한다면, 각 공격대의 공략 진도 차이는 그 폭이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주 7일 혹은 6일을 쏟아부어 빠른 공략을 이루어낸 공격대의 성과를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다. 요점은 이것이다. 게임 속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자원은 다르다는 것이다.

약간 엇나가는 이야기지만, 그렉 코스티켄이라는 사람이 정의한 게임의 정의를 잠깐 짚어보자. 정확히 말하자면 그렉 코스티켄의 게임론을 인용하여 일본의 바바 히데카즈가 RPG론을 이야기하며 언급한 내용이다. 

여기서 코스티켄은 (혹은 바바 히데카즈는) 게임을 이렇게 정의한다. 

참가자가 게임토큰의 조작에 의한 자원 관리 를 통해 목표의 달성을 이루고자 의지결정하는 모든 행위를 말한다. 

굵은 글자로 표시된 네 가지 요소가 게임을 성립시키는 중요한 항목들이다. 나는 공격대의 운영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눠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공격대를 운영'하는 행위 자체를 '공격대에 참가'하는 행위와는 다른 차원의 '게임행위'로서 인식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공격대내에서의 평가가 어떠하든간에, 전자는 운영진활동으로 새로운 게임 라이프를 즐긴 것이고, 후자는 단지 '레이드를 뛰고 싶었을 뿐인데 게임이 아닌 다른'짐'을 떠맡은 것'이 된다. 어느 쪽이 더 제대로 게임을 즐긴 것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공격대에 참가하는 것과 다른 차원에서 공격대를 운영하는 것이 또다른 형태의 게임행위가 된다면, 공격대의 운영자에게 가장 중요한 자원은 바로 공대원의 '시간'이다. 새로운 공략 인던이 나왔을 때 운영자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단순하다. 
자원의 수입을 늘리던가 -> 공격대의 레이드 일정 추가다. 
지출을 줄이는 것이다 -> 공격대의 일정 중 그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고 다른 대체 방안이 있는 것을 포기한다. 

주 7일의 레이드 일정을 갖는 것이 '가능한' 공격대에 소속된 사람은 자원이 풍부한 게임을 하는 것이다. 주 3일의 레이드 일정을 갖는 것만이 가능한 공격대에 소속된 사람은 그 자원을 최적으로 관리해서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게임의 본질이다.

'하루만 더 늘릴 수 있다면' 하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불가능한 동안은 어떤 해답도 되지 못한다. 주어진 자원안에서 최선을! 

나는 기대에 근거한 믿음보다 이해에 근거한 신뢰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한 사람을, 혹은 한 집단을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믿는 것은 다 허상이고 거품일 뿐이다. 전사 E에 대해 이런 '신뢰'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마음가짐을 버릴 수 없다면 메인 관두세요'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비록 계속해서 인적구성은 변화해왔을 망정 공대의 기본적인 논의 방식에 대한 '신뢰' 또한 있었기 때문에 그 어딘가에 해답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없다고 해도 상관없다. 해답이 없다면 또 어떤가. 인생에 미해결로 남겨둔 숙제가 어디 한둘이던가. 그것 때문에 모든 인생이 나락으로 빠지는 것도 아닌데. 요컨대, 중요한 것은 신뢰의 실체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 아닐까? 이해인가, 기대인가. 우리는 우리를 알고 있는가. 혹은 우리는 우리가 막연히 그럴 것이라고 믿고만 있는가. 

겨우 메인탱커의 홍역을 가라앉히고 한숨 돌린 뒤 
이제는 공대원들을 어떤 새로운 일정으로 설득해야 하나 고민하는 공대장을 보면서, 
나는 문득 과거의 어느 날을 생각했다. 
공대장이었던 내가, 
사원 공략 일정 때문에 화심을 포기할 것인가 레이드 일정을 늘릴 것인가, 결정해야 했던 그때. 
정말로 내가 선택하고 싶었지만, 선택할 수 없었던 길. 
그러나, 지금은 선택할 수 있는 길을.

덧: 얼마전 비밀글로 질문을 남겨두신 분께. 
요즘 제가 덧글에 대답할 정신적 여유가 없어 답을 못드렸습니다.
질문하신 내용에 대한 답은 아마 다음회에 나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기다려주시기를.

공격대 이야기 [Naxx] - 11 : 또 하나의 40명
공격대 이야기 [Naxx] - 12 : 역병술사를 넘어서
공격대 이야기 [Naxx] - 13 : 패치워크와 놀기 (1)
공격대 이야기 [Naxx] - 14 : 패치워크와 놀기 (2)
공격대 이야기 [Naxx] - 15 : 패치워크와 놀기 (3)
공격대 이야기 [Naxx] - 16 : 패치워크와 놀고 난 후에
공격대 이야기 [Naxx] - 17 : [별전] 아이언포지의 장미 (1)

거대한 용광로와 모루, 
이글대는 쇳물의 열기가 후끈거리고, 
땅땅 울리는 쇠망치 소리가 24시간 멈추지 않는 곳. 
드워프들의 수도 아이언포지는 얼라이언스의 중심 도시다. 
어느 서버나 그렇겠지만 아이언포지의 은행 앞은 항상 북적거린다. 
그곳은 힘겨운 레이드를 마치고 돌아온 투사들의 휴식처이자, 
또 다른 모험 장소를 향해 떠날 준비를 하는 이들이 장비를 점검하고 칼날을 닦는 대기실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이언포지는 (아마도 호드에게는 오그리마가 그렇겠지만) , 
아제로스의 모험가들이 반드시 한 번은 거쳐가는 곳, 
모든 소식들이 오가고 정보가 교환되는 곳, 
그리고 가장 화려한 장비와 무기를 뽐내는 선남선녀 (....) 들의 전시장이기도 하다.

.....그렇다. 
아이언포지 은행 앞은 바로 와우의 사교계인 것이다! >ㅁ<

내가 속한 서버는 공격대 활동이 굉장히 활발한 곳이다. 인구도 많고 일반서버다 보니 그런 모양이다. 막공도 활발하지만, 그만큼 정규 공격대 역시 많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면 은행에서 오가는 이야기들의 상당 부분이 자신이 속한 - 혹은 다른 사람이 속한 공격대에 대한 이야기다. 

소위 잘 나가는 공격대도 있고, 내부적으로 문제가 많아 곧 망할 거라는 소문이 흉흉한 공격대도 있다. 어느 공격대는 공대장의 횡포가 심해 소속 공대원들조차도 혀를 내두르며, 손해 보지 않고 떠날 타이밍만을 노리고 있다는 꽤 험한 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 어제까지 잘나가던 공격대가 오늘 갑자기 어려움에 처했을 때, 혀를 차며 안타까워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럴 줄 알았다며 조소하는 이들도 있다. 어디나 사람 사는 곳은 똑같다. 다정도 있고, 비정도 있다.

공격대 이야기 [Naxx] - 18 : [별전] 아이언포지의 장미 (2)

그 사람은 바로 소문으로만 듣던 푸른장미 그룹의 리더였다. 순간 로잘리는 재빨리 이쪽과 그쪽 공대의 인원수를 비교해본 뒤, 한번도 이야기 나눠본 적이 없는 푸른장미에게 대뜸 귓말을 날렸다. 이쪽에서 모이고 있던 팀이 있는데 괜찮다면 단체로 건너가겠다고. 의외로 상대도 화끈(...)하게 응해서, 처음 뵙겠습니다 어쩌구 하는 인사치레도 없이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클래스 숫자를 묻고 재빨리 양 공대를 합쳐 인원을 채워나갔다. 

그날은 양쪽 공대 인원은 얼마 없고 거의 막공으로 모은 상태라 큰 성과를 보지 못하고 헤어지게 되었지만, 그 공대를 해산할 때 푸른장미의 리더가 한숨을 내쉬며 '녹색용 레이드의 어려운 점'을 토로하는 것을 듣고, 로잘리는 그가 자신과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기동력과 조직이 필요한 레이드인데, 공대 단독의 힘으로는 그것을 확보하기가 어렵다는 고민.

그래서, 둘은 그날 어렴풋하게나마 '만약 가능하다면 서로 녹색용이 떴을 때 인원이 모자랄 경우 연락을 취해 같이 모이는 건 어떨까' 하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확실히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것은, 공대 전체의 의사를 확인해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 제안을 공대 운영진 회의에 붙였을 때, 로잘리는 매우 조심스러운 반응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한 번도 해본적이 없는 필드 레이드에 대한 막연한 귀찮음 + 푸른 장미의 그룹 리더에 대한 세간의 평으로 인한 선입견 때문이었다.

푸른 장미의 그룹 리더가 세간에 어떻게 알려져 있었던가. 그는 전사이자, 공대장이자, 메인탱커로 탁월하고 우수한 지휘자라고 정평이 나있었다. 푸른 장미 그룹 자체는 공략 순위 1위는 아니지만, 아마도 개인의 역량만으로 따진다면 1,2위를 다투는 붉은 장미와 흑장미의 어느 지휘자에게 견주어도 꿀리지 않을 거라고들 했다. 단지, 성격이 너무 강하고 고집이 세서 주변에 2인자가 살아남지 못할 정도라는, '매우 드라마틱한' 평을 얻고 있었다. -_-b

우리 공대와 푸른 장미 그룹의 녹색용 연합에 대해 걱정을 한 공대원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공대원: 사실, 우리 공대는 촌스러운 공대잖아요. 
나: 버럭!
공대원: 촌스럽고 순진하죠. 게임하는 시간이 많긴 해도 근본이 폐인(.. -_-;;)은 아니라구요. 공대원도 순진하고 공대장도 순진하고.
나: -_-;;;; (허허.. 살다 살다 별 소리를 다 들어본다.. ㅠㅠ ... 연기 잘했네)
공대원: 그렇게 그렇게 촌스러운 방식으로 몹을 잡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장점인데, 사실 푸른 장미 쪽은 너무 강해요. 같이 녹색용을 잡고 하면 그런 걸 더 뼈저리게 느끼게 될 거에요.
나: 그래서?
공대원: 그러니까..
나: 푸른장미의 그 강력한 힘에 우리가 눌리게 될까봐 걱정이라는 뜻?
공대원: 말하자면 그런 거죠. 

위의 공대원 말고도, 내가 푸른 장미의 그룹 리더와 연합을 모색하기 시작하자 노부인(...) 계통이나 기타 여러 가지 통로로 우려의 목소리들이 전달되어왔다. 그 목소리들의 공통된 말은 이것이었다.

푸른 장미의 리더는 너무 강하다. 순진한 로잘리는 휘말리게 될 것이다. (......)

공격대 이야기 [Naxx] - 19 : 세기말, 사과나무 아래에서

패치워크를 잡은 지 두 달이 지났다. 
확팩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었고, 겨울이 왔다. 
확팩에 앞선 대규모 패치도 이루어졌다. 
막연하던 세기말의 느낌이 이제는 피부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가 정말로 '월드'라면 이 세계를 만든 신들은 바로 블리자드다. 신들은 더 많은 신도를 필요로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말세와 파멸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해야만 한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잃어버리는 것도 있고, 얻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무엇보다도 신들은 비정하다. 개벽 과정에서 흘러내리는 피는 신경쓰지 않는다. 

아마 2007년 초반 게임계 최고의 화제는 월드오브워크래프트의 확장팩 불타는 성전의 발매 뉴스일 것이다. 게임 속의 세상에 국한시켜서 말하자면, 곧 세상이 뒤집히게 된다는 것이 거의 확실해지자, 기존의 모든 가치들이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신비한 수정이라든가, 검은 연꽃 같은 물품들의 경매장 판매가가 절반으로 줄었다는 것은 아주 작은 예일 뿐이다.

오리지널의 궁극 아이템들로 불렸던 모든 것들이 조만간 '쓰레기'가 될 것이라는 예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가장 가치가 하락된 것은 '레이드' 그 자체다. 이제 얼마 후면 아무런 가치도 없어질 아이템들을 위해 물품 준비만으로도 벅찬 레이드를 해야할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간다. 

확장팩 이전에 낙스라마스를 클리어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은 공대는 (그리고 사실 이런 공대의 숫자가 더 많다) 점차 비전을 잃어간다. 확팩 후에는 무엇보다도 우선은 70레벨을 찍는 것이 제 1순위가 될 것인지라, 문이 닫히기 전까지 클리어를 못하는 공격대는 그 이후에도 못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떠나간다. 확팩 직전에 어찌어찌 일정한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공대라고 해도 상황은 밝지 않다. 대부분의 공격대들은 포인트제도에 의해서 아이템을 획득하게 되는데, 어디에나 상대적 포인트 강자들이 있어서 막 공략에 성공한 네임드에서 나온 따끈따끈한 아이템은 대부분 그런 포인트 강자들의 차지가 될 것이고, 경쟁에서 밀리는 사람들은 함께 공략을 했다 해도 그 성과물인 단 열매를 취하기 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만 한다. 그런데, 그 시간 동안 과연 공대가 남아있을까? 의문스러울 뿐이다. 먼저 아이템을 다 맞춘 '원로'들은 곧 렙업과 확팩 25인 레이드를 위해 떠나가겠지. 그렇다고 아무리 70레벨을 찍어도 남은 인력만으로 쉽게 파밍할 수 있을 만큼 낙스라마스가 만만하지도 않고. 

불신이 낳은 암울한 미래의 상상도가 그럴듯한 현실로 여겨지면, 누구도 공대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 누구도 자신을 희생하기 위해 살지는 않는다. 떠나가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공개창에 늘 신규인원을 모집하는 공격대팀의 홍보 문구가 올라온다. 각종 와우 커뮤니티에서는 이런 신규 모집을 '망해가는 회사에서 신입사원을 채용하는 격'이라며 비난하는 목소리도 있다. 레이드 아이템의 가치가 땅에 떨어졌다고 고소하다는 사람들, 어차피 70렙 레이드를 통해 최상위 아이템을 얻게 될 것은 현재의 레이드 유저들일 거라고 비웃는 사람들. 세상의 멸망이 다가오면 묵혀두었던 모든 은원들이 밖으로 불거져 나온다더니, 별 관계도 없는 사람들끼리 마치 원수라도 되는 듯이 상대에게 칼을 겨누고 낄낄대고 비웃고 분개한다.

그대로, 돌아가는 그대로 내버려두어도 지금 와우의 분위기는 충분히 세기말적이다. 그러나, 신들은 그걸 내버려두지 않았다. 확장팩 직전 대규모의 패치를 통해 그 세기말의 분위기에 한층 속도를 얹어주었다. 바로 전장 아이템의 획득 방식을 변경한 것으로 해서 말이다.
 
와우에서 최고레벨의 아이템을 얻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PVE , 즉 유저들과 대립하는 강력한 몬스터들이 배치된 인스턴트 던전에 들어가서 몹을 잡아 획득하는 것. 이것이 레이드다.  다른 하나는 PVP, 이것은 마치 배틀넷처럼 호드와 얼라이언스의 신청자들이 입장해서 서로 해당 맵의 승리 조건을 충족시키면 그 승리 기여도에 따라 명예점수를 얻고 그것에 따라 소위 '전장'의 엔피시들이 파는 아이템을 얻는 방식이다. 

블리자드는 '조만간 나올 확팩에서 일반 퀘스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아이템들이 지금 최고레벨의 레이드를 통해 얻는 아이템보다 좋아!' 라는 유혹으로 우선 '레이드'에 충격을 준 뒤, PVP 전장 아이템의 획득 방식을 폭풍의 전조라는 대규모 패치로 뒤집어 엎어버렸다. 

과거에는 전장 아이템 중에서 정말 좋은 것들은 "계급"에 따라 살 수 있었다. 이 계급은 명예점수의 상대 평가로 획득되는 것이었다. 즉, 일주일에 한 번 전원의 계급이 정산이 되는데, 그 기간동안 해당 진영에서 전장을 뛴 사람들간의 상대 평가를 통해 최고사령관과 정찰병 파수병이 나뉘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 최고사령관의 아이템을 사기 위해서는 정말 피나는 노력이 필요했다. 오죽하면 세 사람이 한 캐릭을 8시간씩 맡아 24시간 전장을 뛰어야 달 수 있는게 최고사령관이라는 소리가 다 나왔을까. 그래서 최고사령관의 아이템을 차고 다니는 유저들은 레이드에서 상위템을 얻은 사람들 만큼이나 부러움을 샀었다.
그런데, 폭풍의 전조에서 이 상대 평가가 절대 평가로 바뀌었다. 즉, 일정 숫자 이상의 명예점수를 획득하면 그 점수를 돈처럼 지불하고 아이템들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예전에는 몇달을 뛰어야 살 수 있었던 최고사령관의 무기를, 이제는 맘먹고 밤새면 일주일 안에 쌍으로 사는 사람들도 많다. 방어구는 줄구룹 인던 수준이라도, 누구나 등짝에 '최고사령관의 클레이모어'를 메고 다닌다. 한때는 레이드 다니는 애들보다 더 폐인 - 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소수의 전장 유저들만이 얻을 수 있었던 아이템이, 이제는 길거리의 돌멩이보다 더 흔해졌다. 소위 '교복'이 된 것이다.

이 패치 하나로, 와우의 모든 것이 흔들리고 뒤집혔다. 화산심장부 막공이나 검은날개 둥지 막공, 줄구룹 폐허 20인 공대는 사람 모으기가 힘들어졌다. 그런 곳에 가면 개념이 있네 없네 힐을 못하네 딜이 구리네 잔소리 듣고 아이템을 좀 먹으려고 해도 님이 그걸 왜 굴려요 녹템은 죄송해요 소리 나오고, 인구수가 많은 직업은 늘 전도냥법 풀이라는 벽에 부딪쳐야 했다. 하지만 전장은 그런거 없다. 

호드와 얼라이언스가 격돌하는 이 '전장'은 훈련된 정규 군대가 아니라 그야말로 오합지졸 용병들의 군대다. 호드 40인, 얼라이언스 40인 총 80인이 격돌하는 알터랙 전장 같은 경우가 그 대표적인 케이스다. 개인적으로 입장을 신청하고 잠깐 기다리다보면 방이 만들어지고 양측 80인이 우르르 입장한다. 서로 각자의 본진이 있고 그 본진에는 각자의 사령관 엔피시가 있다. 맵 이곳저곳에 부관 엔피시와 거점, 부활이 가능한 무덤들이 있다. 거두절미하고 상대편 사령관 엔피시를 먼저 죽이는 쪽이 이긴다. 중간중간의 거점이나 부관들을 해치우면 보너스 점수를 받게 된다. 전장에 있는 동안은 다른 아군이 적을 죽였어도 똑같이 명예점수를 받기 때문에 게으름을 피워도 지장이 없다. 승리가 목적이 아니라 명예 점수가 목적이기 때문에 오랜 시간을 질질 끌어서 이기는 것보다는 빠른 시간내에 지고 다른 게임을 하는 쪽이 더 효율적이기도 하다. 

전투가 끝나면 각 서버로 흩어지게 되니 개념이 있네 없네 매너가 있네 없네 하는 주위의 평가에도 신경쓸 일이 없다. 오늘 하루 전장에서 마주치고 헤어지면 그뿐. 비겁한 자의 이름도 용감한 자의 이름도 남지 않는다. 다들 눈이 벌건 채 좀 더 많은 명예 점수를 향해 줄달음칠 뿐이다. 

명예점수를 잔뜩 쌓아서 도시로 돌아가면 아이템을 살 수 있다. 이 아이템이면 지난 일이년간 힘들게 전장을 뛰거나 레이드를 뛴 사람 못지 않은 장비로 확장팩을 맞이할 수 있다. 실제의 '전쟁'과 마찬가지로, 이 '전장만세'의 시대는 모든 가치를 파괴하고 질서를 붕괴시킨다. 일확천금이 가능한, 전복의 시대다. 모든 순위와 서열, 강자와 약자가 리셋되어간다. 다들 똑같아지는 것이다. 요즘 아포에 서있다보면 마치 유행에 민감한 사람들이 지나가는 거리를 보는 듯 하다. 다들 똑같은 갑옷, 똑같은 무기. 그리고 명예점수에 벌개진 똑같은 눈빛. 세기말의 풍경이란 바로 이런 것일까? 몇몇 아쉬운 파트의 아이템을 전장 템으로 교체하기 위해서 나 역시 폭풍의 전주 이후 전장을 달리기 시작했고, 그렇게 달리다가 문득 주변을 돌아보고는, 아, 이것이 바로 세기말이구나, 하는 느낌에 젖었다. 신들의 권능이란 참으로 놀랍지 않은가. 단 하나의 가치를 무너뜨려, 모든 가치를 재편하다니.

바라던 아이템에 못지 않은 것을 전장에서 더 편하게 구할 수 있으니 굳이 레이드를 뛸 이유가 없다며 공대를 떠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그야말로 최악의 악재라는 악재는 다 똘똘 뭉친 셈이다. 낙스라마스에 입성할 때 희미하게 예감했던 세기말의 겨울은, 그 예감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혹독하게 찾아왔다. 우리들은, 그 겨울의 초입에 패치워크를 잡았고. 패치워크 후에 보너스몹이라고 일컬어지는 그라블루스를 무려 한달이나 걸려서 잡았다. 그것은 그라블루스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패치워크를 잡고 난 후 다시 패치워크를 잡고 한 발 앞으로 나갈 여력을 확보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확팩 이후 공대의 미래에 대한 조금씩 다른 의견들, 안퀴라스의 완전 포기에 대한 공대 내부의 의견 갈등, 운영진 내부의 트러블....... 그 멋대가리 없고 골치 아픈 회색 현실의 문제들이 패치워크보다도, 그라블루스 보다도 어려웠다. 우리들은 신도 천사도 아니다. 편협하고 옹졸한 인간들일 뿐이다. 우리들 역시 서로를 불신하고, 때로는 욕심 내고, 조급해하고, 지치면서 힘겹게 한 걸음, 한 걸음 절뚝이는 발을 질질 끌면서 앞으로 나간 것이다. 

그리고, 그라블루스를 잡았다.

그 다음 네임드인 글루스를 잡는데 다시 반 달이 걸렸다. 많은 공격대들이 점차 빠져나가는 인원 때문에 늘 풀공대를 이루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서도, 기적처럼 우리 공대는 늘 '도전 코스'에서 오히려 참석이 더 좋아 풀공대가 되곤 했다. 공략과 도전 자체를 즐기는 분위기 때문일 거라고 믿지만, 그 힘만으로는 버티는 것에도 한계는 있다. 취업 때문에 떠나는 사람들, 일 때문에 결석하는 사람들이 아예 없을 수는 없다. 그건 용케 전염병을 피한 마을에도 자연사하는 사람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새로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다면, 인구는 줄어들 수 밖에 없다.
확팩 이후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될까? 확팩 때까지 낙스의 끝을 보지 못할 것이 거의 확실해진 상황에서, 그 질문에 100프로 확실한 장담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중 아무도 없다. 공대원들에게 신뢰를 주어야 한다. 무슨 신뢰를? 여태까지 의심해마지 않던 모든 것이 다 의심스럽게 보이는 이 마당에, 우리는 상대가 원하는 신뢰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

패치워크를 잡았을 때 가장 기뻤던 것은 우리가 우리들 자신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는데, 이제 그 정반대되는 절망이 다가온 셈이다. 우리는 정말 우리를 잘 알고 있었을까? 공대원들은 정말 공대가 계속 유지되기를 바랄까? 어떤 사람은 그렇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레이드를 계속하는 것보다는 렙업을 먼저 하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러면 낙스의 끝은 결국 못보게 될 거라고 말한다. 정말 우리는 뭘 원한 것일까? 낙스는 확팩 이후에도 가치가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그렇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신이 아니기에 미래의 모습을 알지 못한다. 확팩 베타테스터를 해본 '예언자'들이 이러쿵 저러쿵 말을 해도 그걸 100프로 신뢰할 수는 없다. 베타는 베타, 예언은 예언일 뿐이며 신들이 어디까지 장난을 칠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모든 것은 혼란스럽고, 레이드가 끝나면 누구나 전장을 달렸다. 무감동하게 호드를 죽이고, 죽고. '요즘 전장에 가서 누가 쟁을 하나요? 드랙타르 레이드를 하지." 라고 중얼거린다. 열심히 애써서 이기는 것보다 빨리 지고 여러판 뛰는 것이 더 이득이기 때문에 소위 '지자 공대' 라는 것도 생긴다. -_-; 들어가서는 아무 싸움도 안하고 그냥 순식간에 져주는 것이다. 

넋을 잃고 망연히, 이 기울어가는 종말의 세계를 본다. "내일 지구에 종말이 온다고 하더라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어디에도 심을 사과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있는 힘을 다해 글루스를 잡고....

(.. 정상적인 편집)
(... 소수분들만 이해하실 약간 비정상적인 편집 - 먼산)

그 다음, 
우리가 향한 것은 골렘지구의 윙보스인 타디우스였다. 
엑스맨 하나가 모든 것을 무로 돌린다는 바로 그 네임드, 타디우스. 
우리들은 성탄절을 낀 연말 연시, 곧 다가올 확팩이라는 악재까지 등에 업은 채 
골렘지구의 마지막 관문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끼이이익.
육중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공격대 이야기 [Naxx] - 20 : 아, 타디우스!

낙스라마스에 입성하면 시시때때로 한 여자의 처절한 절규가 울려퍼진다. 
제발 - 안돼 - 도와줘.
그 소리는 너무 애절해서 오싹 소름이 끼칠 정도다.
낙스에 처음 왔을 때 도대체 저 오싹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누굴까 물었더니 
아는 사람이 대답해주었다.
타디우스, 라고.
글루스를 잡고 넓은 통로를 가로질러 가서 문을 열고 들어가보면 독성 수액이 가득한 수로 위에 세 개의 큰 제단이 있고, 양쪽 제단에는 줄구룹의 구루바시 광전사를 닮은 -_-;; 괴물이 한 마리씩. 그리고 제일 안쪽 가운데 제단에는 프랑켄슈타인처럼 온몸이 꿰맨 자국 투성이인 거인 남자가 서있다. 그 남자가 바로 타디우스다. 분명 여자의 음성으로 비명을 질렀는데 말이다. 

공격대가 문을 열고 들어가면, 타디우스는 가늘어지는 여자의 음성, 그리고 그것을 뒤덮은 남자의 음성이 뒤섞인 소리로 처절하게 뇌까린다.

"너무... 늦었다... 난 복종해야만 한다..."
.... 이런 짝퉁 벨라 같으니라고 

타디우스의 배경 스토리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세팅된 상태를 보면 대충 짐작이 가는 패턴이 있다. 타디우스는 타락한 벨라스트라즈처럼 뭔가에 의해 제압되는 '고문' 내지는 개조 실험을 당하는 와중이었던 것 같고, 그 고통에 몸부림치며 내내 비명을 질렀지만 결국 플레이어들이 도착했을 때는 막 그 '실험'이 끝난 참인 것이다. 그래서 '늦었다' 라고 한다.

양쪽 제단에 서있는 두 괴물의 이름은 각각 스타라그와 퓨진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그들 뒤에는 뭔가 전기 장치 같은 것이 지직거리고 있는데, 이 두 마리가 지키고 있는 장치가 테슬라 코일 (...) 이고 이 코일을 통해서 타디우스의 제압, 혹은 개조가 유지되고 있는 듯하다. 때문에 타디우스에게로 나아가려면 우선 이 두 마리부터 해치워야 한다. 이것을 타디우스 전투의 제 1페이즈라고 한다.

스타라그와 퓨진은 안퀴라스의 쌍동이 제왕 몹처럼 각각 마법과 물리 공격력의 특기를 갖고 있는데, 쌍동이 제왕과 달리 자기들끼리 주기적으로 위치를 교체하는 것이 아니라, 탱커를 반대편으로 날려 버린다. 그리고는 자기가 날려버린 탱커를 쫓아 반대편으로 가려는 성향이 있는데 만약 스타라그와 퓨진이 각자의 테슬라 코일로부터 일정 거리 이상 멀어지면 자동적으로 엄청난 광역 데미지가 터진다. 때문에 이 두 마리는 절대 원위치에서 움직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다행히 이 두 마리는 상대편 탱커에 대해 어그로를 공유하며, 도발이 먹힌다. 그래서 페이즈 1에서의 전술은 각각의 위치에 탱커가 한 명씩. 그리고 탱커들이 상대편 자리로 던지기 당해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의 '잠깐' 시간 동안 그 자리에 머리를 고정시켜줄 '도발 전사'가 서포트를 하는 식이 된다. 또한 이 두 마리는 화산심장부의 사냥개처럼 동시에 죽이지 않으면 서로를 부활시키기 때문에 양측 공대원들이 서로가 맡은 몹의 피를 확인하면서 거의 동시에 잡아야만 한다.

1페이즈만 해도 상당히 복잡한 패턴인데, 2페이즈는 더 하다. 스타라그와 퓨진을 눕히면 테슬라코일이 폭주를 일으키며 그동안 굳어 있던 타디우스가 깨어난다. 타디우스는 전투 개시 후 5분 안에 광폭화하기 때문에 반드시 그 전에 잡아야 한다. 절망감을 안겨주는 산수놀이 하나. 타디우스의 총 HP는 패치워크의 두배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절대로 5분 안에 잡을 수가 없다. 또한 패치워크의 광폭화보다 타디우스의 광폭화가 훨씬 강도 높아서, 패치워크는 피가 조금 남았을 경우 광폭화가 일어나도 어찌어찌 희생자를 남기면서 잡을 수 있다지만 타디우스의 경우에는 불가능하다.

이런 불가능한 산수에 그나마 희망을 주는 조건이 있다. 타디우스는 일정중기로 자기 주변의 인간들에게 전기의 극성 중 하나를 부여하는 기술을 시전한다. 공격대 전원이 플러스 이거나 마이너스, 둘 중 하나의 극성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만약 같은 극성끼리 가까운 거리에 모여있을 경우 그 누적된 숫자만큼 데미지 증가 효과를 받게 되는데 40명 총원이 모두 이 극성의 데미지 증가 효과를 받을 경우 늘어나는 폭이 약 두배가 된다. 정확히, 패치워크를 5분 안에 잡은 공대가 타디우스를 5분 안에 잡을 수 있는 딱 떨어지는 숫자에 근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희망은 다시 절망이기도 하다. 같은 극성끼리 모여 있다면 데미지 증가 효과를 받지만, 가까운 거리에 반대 극성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서로 반응을 일으켜 2천씩 데미지를 주게 된다. 만일 18명의 +전하 사이에 - 전하 한 명이 있다면? 그 - 전하인 사람은 나머지 18명 전원에게 2천씩 데미지를 주고, 자기 자신은 18명의 +들로부터 2천씩 데미지를 받아 바로 눕게 된다. 게다가 타디우스는 기본적으로 계속해서 연쇄번개를 쏘는데 이 연쇄번개는 좁은 지역에 밀집한 사람들에게 연속적인 데미지를 주기 때문에 공대원들의 HP 상태는 늘 너덜너덜한지라, - 전하 한 명이 일대에 입힌 2천의 데미지로 순식간에 몇명이 누울 수도 있다. 사람의 숫자가 줄어들 수록 데미지 증가의 폭도 줄고, 결국 5분 이내에 타디우스를 눕힐 가능성은 사라진다. 
정확히 플러스 마이너스의 자기 극성에 따라 5초 안에 미리 약속된 장소로 이동하지 않으면 절대로 잡을 수 없다는 점에서 벨라나 쌍동이제왕을 연상시키고, 무지막지한 HP는 패치워크를 능가하며, 한 명이라도 실수하면 안되는 복잡성면에서는 쑨을 닮은 네임드. 세기말의 사이버펑크적인 분위기를 제대로 살린 그, 혹은 그녀가 바로 타디우스다.

척 보면 알겠지만, 복잡하니까 당연히 우리가 약할 수밖에 없는 몹이다! 게다가, 상황은 안 좋았다. 타디우스에 처음 들이대기 시작한 날은 12월 25일. 가족과 연인에게 의무봉사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들 때문에 출석율은 떨어졌고, 풀공대를 이루지 못한 상태로 타디우스에 대한 도전이 시작되었다. 

그 다음 주는 다시 신정. 계속 상황은 좋지 않았다. 정말 문제는 단지 연말 연시의 일시적인 상황으로 치부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제 곧 확팩이 다가오는데다가, 전장 패치가 이루어졌고 세기말의 분위기로 온 아제로스가 들썩거린다. 또 새해는 많은 사람들이 삶의 방식을 리셋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떠나야 하거나, 새로운 일을 준비해야만 한다. 사람을 잃지 않기 위해 애를 써서 최대한 전력을 보존해도, 떠나는 것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다. 예전 같으면 그렇게 떠나간 사람을 새로 보충하고 또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나가면 되지만, 이제는 그러기도 힘들다. 남은 사람들은 초조하게, 점점 줄어드는 모래시계를 바라보며 마른 입술을 적시는 것이다. 

초조함은 우리를 늘 성급하게 만든다. 성급함은 또 우리를 쉽게 지치도록 한다. 1주일, 2주일. 타디우스를 잡기 위해 적은 인원이나마 애를 썼지만 좀처럼 타디우스는 누워주지를 않았다. 패치워크때와 같은 기적을 바라며, 레이드 종료 시간을 얼마 남기지 않은 상태에서 다같이 외부 버프를 받은 뒤에 잔뜩 긴장하고 막 도전하려던 순간, 어이없는 사고로 모두 몰살해서 예기가 완전히 꺾인 상태로 풀이 죽은 채 해산한 일도 있다. 기적은, 두 번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기적인지도 모른다. 

그날, 해산할 때 타디우스에서 몇 번이나 좌절을 맛본 메인탱커는 공대원들에게 말했다. 
"만약 다음 하루 더 타디우스에 도전해서도 못 잡는다면, 당분간 타디우스는 패스합니다."
확팩을 일주일도 안남겨둔 1월 12일은 그렇게 왔다. 오늘 타디우스를 못 잡는다면 우리는 당분간 타디우스를 볼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영원히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더 이상 외부 버프를 필요로 하지 않는 패치워크를 잡고, 그라블루스와 글루스를 해치운 뒤 타디우스 앞에 다시 모였다. 몇 번의 도전, 그리고 지난 번과 다를 바 없는 패배. 시계 바늘은 점점 기울어갔다. 좀처럼 생존률이 나아지는 기미가 없었기에 (꼭 누구 한 명씩은 랙이나 접종으로 대학살을 일으키더라 ㅠㅠ) 이 상태로는 외부 버프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드는 상황이었다.

이도 저도 안 풀리는 상황에서 메인탱커가 말했다. 

"아직도 기본적인 생존과 이동이 안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데미지 딜링은 무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생존과 이동, 증뎀 효과를 위한 거리 유지에만 초점을 두는 연습을 해볼게요. 뎀딜 신경 안쓰셔도 됩니다. 이동을 최우선으로 해주세요."

그렇게 해서 '연습게임'이 시작되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연습경기는 흘러갔다. 스타라그와 퓨진을 잡는 제 1페이즈. 그리고 2페이즈. 극성 시전! 양전하는 양전하끼리, 음전하는 음전하끼리! 이동! 거리 유지!

피마르는 5분. 중반까지는 제법 잘 흘러갔다. 그래도 연습치고는 성과가 좋은 편이었다. 후반. 한 명이 오프라인되었다. 아니나다를까 결국 반대편에 큰 참사가 일어났다. 음전하 쪽이 거의 몰살되다시피 하면서, 약 8프로 시점에서 메인탱커가 누웠고, 뎀딜이 딸리기 시작했다. 전사들, 그리고 도적들이 차례차례 잠깐씩 탱킹을 하다가 죽어넘어졌다. 2퍼센트가 남은 상태로 광폭화가 시작되었다. 

얼마전과 똑같았다. 그땐 열심히 뎀딜을 해서 1퍼센트 상태로 광폭화를 봤지만 그 1프로도 깎지 못하고 모두 타디우스에게 몰살당한 일이 있다. 그 기억은, 아직 우리들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은 채였다.

그래서, 2프로가 남은 타디우스, 그리고 생존한 열댓명의 사람들을 보고도, 아무도 타디우스를 잡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외부 버프 받고 오면 잡을 수 있겠네요."

그나마 희망적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메인탱커는 전멸사인을 내지 않았고, 생존한 사람들 역시 '못잡는다'는 걸 알면서도 이상하게 손을 멈추지를 못했다. 도적 한 명이 어그로를 먹었다. 회피를 켰다. 2프로에서 1프로가 될때까지, 그 도적이 타디우스 탱킹을 하다가 누웠다.. 몇초. 제법 긴 시간이었다. 

또 몇 명이 누웠다. 남은 힐러는 나와 사제 한 명. 그리고 몇명의 사냥꾼과 도적. 총 8명. 그중 사제가 죽었다. 누가 누군지 분간도 못하는 상태에서 아무데나 힐을 마구 날리고, 뭔지도 모르는 물약을 먹고, 안간힘을 쓰다가 이판 사판 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양손무기로 바꿔쥐었다. 그리고 다가가서 에라 날 죽여라 -_-;; 라는 심정으로 망치를 휘두른 순간...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가 반반섞인 음성이 들려왔다.

"고.. 맙.. 다."

우리는 얼떨결에 타디우스를 잡고 말았다. 말그대로, 얼떨결에. 

이것으로 낙스라마스 9킬. 우리가 종말의 문이 닫히기 전에 도달할 수 있는 곳은 여기까지가 끝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하나쯤 더 잡거나.

타디우스를 잡고나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다. 분명히 5분 이내 극뎀딜을 해야 하는 몹인데, 왜 뎀딜에 신경쓸때는 못잡다가 정작 뎀딜 말고 이동에 좀 더 신경쓰는 연습을 하자 하니 조금 어거지지만 잡을 수 있었을까? 

기본을 잃지 않는 것, 그러면 그외의 것은 자연스레 따라오게 된다는 것이 타디우스전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아닐까. 조급해하지 말라고, 5분 안에 모든 걸 끝장내야한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해답은 정작 바로 발밑에 있다고 말이다. 

와우라는 작은 게임 안에서 새로운 대륙 하나가 열리고 레벨 제한이 풀리는 '고작' 그 정도의 일에서 '세기말'을 느낀 것처럼, '5분'의 시간제한을 두고 모두의 피를 말리며 서로를 불신하게 하는 타디우스라는 몹과의 대전을 통해 나는또 거꾸로 '와우의 세기말'을 본다. 
사실, 모든 것은 확장팩의 뚜껑이 열려봐야만 안다. 아무도 미래는 알지 못한다. 이제 다음주면 확장팩. 불타는 성전의 시대가 온다. 많은 공격대들이 해산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우리는 어떻게 될까? 레벨은 레벨 대로 올리고, 일주일에 얼마의 시간이라도 내서 꾸준히 낙스를 공략하자, 아직 다 보지 못한 애들을 남겨두고 가긴 싫다, 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확팩 이후의 25인 레이드를 위해서라도 이 인프라는 유지되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그 반대편의 생각도 있을 것이다. 글쎄, 어찌 될지, 역시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나의 공격대 이야기도 여기가 끝일지 모른다. 다음 주면 다들 뿔뿔이 흩어져 렙업하느라고 말이다. (웃음)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나는 왜 스피노자가 내일 지구가 망하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고 말했는지 감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그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 

... 세상이 망한다고 이리 허둥 저리 허둥 시류에 휩쓸려 남들처럼 약탈하고 살인하고 이것이 기회다 뭐다 하면서 바둥거려봤자, 멋이 없지 않은가, 멋이!

사과나무를 심는 것은 폼이 난다.
그 사과나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덧: 예고편은 없음
    다음회가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어질 이야기가 있을지 없을지는, 모두 40인의 손에 달렸으니.
    
공격대 이야기 [Naxx] - 21 : 그리고, 그들은.

사실, 당분간은 공격대 이야기를 쓰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어떤 형식으로든 확팩 이후 공격대의 행보가 마무리되면 후일담 정도를 추가할까 했었지요. 그런데 1월 17일에 확팩 연기가 발표되었고, 종말의 순간은 좀 더 뒤로 미뤄졌습니다. 

이따금, 낯선 분들이 와서 귓말을 합니다. 그리고는 물어보시네요. 확팩 이후에도 계속 그 공격대는 낙스를 공략할 생각이냐고. 그런 몇 가지 질문에 대한 저 나름대로의 답을 적어봤습니다.

* 확팩 이후에도 낙스 공략이 의미가 있을까?
: 공략으로서의 가치는 '상당히' 줄어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새것에 잘 끌리는 사람들의 속성상 낙스에 대한 도전욕구는 거의 남아나지 않겠죠. 음. 물론 생각하기 나름이긴 하지만요. 아이템 파밍으로서의 가치는, 6:4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확팩 이후에도 레이드를 진행할 근거가 될 만한 이유는 1. 커뮤니티 보존의 가치 2. 오리지널 궁극의 컨텐츠를 소비하고야 말겠다는 개개인의 욕구 3. 투자하는 시간 대비 68-70렙대 아이템으로 교환 전까지의 아이템 파밍가치 라고 생각합니다. 숫자는 우선순위고요. 2번이나 3번의 가치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것만으로는 레이드 유지를 할 수는 없을 겁니다. 확팩 컨텐츠에서 대안들이 많이 나오니까요. 보조적인 동기 쯤 되겠지요. 

역으로 말해서, 저 세 가지 이유, 그 중 가장 중요한 1번 이유가 없는 공격대는 유지될 이유가 없거나, 혹은 유지될 수도 없을 겁니다. 공대원 개개인에게도 판단의 근거가 될 겁니다. 이 공격대의 기본 인적 자원의 유대가 계속 남아있어야할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이후의 확팩 컨텐츠를 즐기는데 중요한 기반이 될 커뮤니티로서의 장점을 보유하지 못한 공격대가 앞으로 계속 40인 조직의 틀을 유지할 수는 없겠지요.

* 그럼 우리 공격대는?
: 확팩 연기 소식을 듣기 전까지 우리 공대는 확팩 패치 주간의 서버대란 예상 기간에 살짝 휴식 (.. 어차피 레이드 진행이 힘든 서버 상태일 거라고 판단) 그리고 공략을 하면서 약간의 관망기를 거쳐 확팩 이후의 공대 상황을 관찰한 후 최종 결정을 내리는 총회를 연다라는 원칙을 운영회의에서 세웠습니다. 그러다가 확팩이 연기가 되었고, 아마도 언제인지 모르지만, 확팩이 개장 되면 앞서 결정한 수순대로 가겠지요. 최종 결정을 내릴 때까지는 어찌되었든 공략은 계속 해나갈 테고요. 유지 가능한 인원이 계속 모이고, 꾸준히 전진하는 한은 어쨌든 레이드는 계속될 겁니다. 반대로 공략 가능한 최소의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면 결국 이만 안녕이 될겁니다. 그 커뮤니티의 보존 가치를 가장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사람들은 커뮤니티 구성원 자신들이 아닐까요. 말하자면, 확팩 이후에는 아마 레이드에 출석하는 행위 자체가 일종의 투표 행위가 될겁니다. 죽이느냐, 살리느냐. 헤어지느냐, 계속 만나느냐. 글쎄요. 앞날은 모르는 거지요. 서로 사이가 좋았다. 분위기가 따뜻했다. 이런 건 총체적인 가치 평가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효율, 유용성까지도 다 포함해야할 테니까요. 물론 뭐, 진인사 대천명 아니겠습니까? ^^ 하는데까지 하는게 최고죠. 

그래서, 확팩 연기가 발표된지 일주일이 지난 지금, 우리 공격대는 헤이건을 잡고, 로데브 트라이 중입니다. 타디우스 두번째 킬이 무난히 이루어질까 꽤 걱정을 했었는데 첫 킬과는 달리 너무나 안정적으로 진행이 되어서 놀랄 정도였고요. 여전히 삽질 안해도 될 곳에서 삽질하고 (요샌 노스가 제일 무섭습니다 ㅠㅠ), 실수도 잘 하고, 레이드 중에 마음 상하기도 하고, 조급해하기도 하고, 작은 일로 기뻐하기도 하고, 레이드 준비물 마련에 허덕이기도 하고, 네임드의 피가 한 칸씩 내려가는것에 희열을 느끼기도 하면서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생활이 고정적인 사람들이 많다보니 주 3일 일정에서 죽었다 깨나도 하루 더 뛰기가 힘들어서 (....) 주 3일, 그것도 하루는 안퀴라스 사원 공략에 투자하면서 참 느릿느릿 걸어온 것 치고는 꽤 많이 걸어온 셈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또 얼마를 더 전진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조급해하지 말고 차분히, 하는데까지,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즐기면서 1분 1초를 보내려고 합니다. 

사실 조금 안타까운 것은, 공격대가 낙스라마스를 클리어하지 못한 상태다보니 내심 '확팩이 늦게 왔으면' 하고 바라는 공대원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애닲은 마음이지요. 우리가 엔딩을 보고 난 후에 개벽이 되었으면 - 하는 바램은 저도 없진 않습니다. 그렇지만, 낙스는 낙스고 또 게임유저로서 새로운 컨텐츠가 나온 건 나온 거죠. 확팩을 즐기는 것이 꼭 낙스에 대한, 혹은 공대에 대한 배신 ( -_)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오히려 '확팩'도 같이 즐기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요. 미처 다 마무리짓지 못한 낙스 때문에 확팩이 개장되는 걸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지 못한대서야 안될 말이죠. 확팩도 가능한 재미있게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답니다.

음, 사실 뭐 공격대의 문제가 어찌 되고 아이템이 어찌 되고, 이런 것들보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확팩 이후의 와우가 재미있느냐, 없느냐일 거에요. 재미없으면 공격대고 나발이고 없죠. --; 다른 게임 찾아 가야죠. 확팩 이후의 공대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공대원 다른 분과 나눈 일이 있는데 결국 결론은 그렇게 내려졌답니다. '어쨌든 와우가 안 망해야 이 모든 이야기들이 가치가 있지. 블리자드가 바보짓해서 확팩 이후 지리멸렬해지지만 않으면 어떤 식으로든 다 재미있게 어디선가 놀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블리자드가 재미있는 확팩 세상을 열어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물론, 재미없는 확팩이 된다면... 같이 눈물을 흘려.. 줄 리가 있겠습니까? 다른 게임 찾아가야지. (....)


공격대 이야기는, 그래서 앞으로는 주별로 연재는 하지 않습니다. 네임드 킬 속보나 동영상을 이따금 전할 수는 있겠군요. 혹은 뭐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그때 올리고요. ^^ 
단, 켈투자드를 킬하거나, 공대를 해산하거나, 제가 공대를 떠나거나, 어떤 식으로든 공대가 막 하나를 내리게 된다면, 그때 공격대 이야기 낙스편의 마지막 장이 올라올 것입니다.

마지막 인사를 나눌 그날이 올때까지, 모두 즐거운 시간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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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hkmade 2011/10/26 14:01 # 답글

    WOW가 머야? 아내와 내가 함께 부부 레이드를 했던 시절 결정적인 뇌관을 터트려준 글이기도 하죠.
    아내와 저 모두 좌백과 진산의 팬인지라... (이제 팬이라고 부르기도 쑥쓰러워요. 책좀 내주세요. 엉엉엉)
  • 박PD 2011/10/26 17:27 #

    글을 워낙 잘 쓰셔서 몇 번을 봐도 재미있네요.
  • 여행일기 2020/07/20 17:15 # 삭제 답글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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